마흔을 앞둔 가장의 퇴사, 내게는 ‘명분’이 필요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안정'이라는 이름의 성벽 안에 갇혀 있었다.
서른 후반, 더 이상 방황은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지만 나는 결국 사직서를 던졌다.
내가 다닌 회사는 정년이 보장되는 공기업이었다. 사기업을 포기하고 선택한 이곳은 안락함이 보장된 요새였지만, 입사 10년 차인 나는 신입사원이나 할 법한 진로 고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결혼 6년 차, 유치원 입학을 앞둔 딸아이를 둔 가장이 대책 없이 퇴사하는 선택은, 내 발로 그 견고한 성벽을 허무는 결단이었다.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 아내의 해외 파견 공고가 떴다. 직장을 벗어나고 싶은 내게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명분'이었다.
사실 해외 살이는 우리 부부의 오랜 꿈이었다. 아내는 어린 시절 7년을 해외에서 보냈고,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낯선 땅에서 살아보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의사표현도 못 하는 어린 딸과 무작정 떠나기엔 늘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다 아이가 제법 자랐고, 마침 날아든 파견 소식은 내게 '이제는 가도 되겠다'는 확신을 주었다.
솔직히 겁이 났다. 오로지 ‘나의 적응 문제’ 때문에 퇴사한다고 말하기엔 가장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으니까.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고, 나 스스로도 도망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는 대외적인 명분이 절실했다.
나는 기회다 싶어 아내를 설득해 지원서부터 면접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마침내 우리는 중국 칭다오행을 확정 지었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배우자의 해외 발령은 '동반 휴직' 사유가 되니, 굳이 사표를 쓰지 않고도 2년 뒤에 돌아올 보험을 들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이미 육아휴직을 통해 경험했다. 뒤에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은 나를 나태하게 만들 뿐이었다. 배수의 진을 치지 않으면, 나는 또다시 그저 그런 하루를 버티는 삶으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흔히들 말한다. 직장에서 10년, 20년 후의 내 모습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 과장님, 부장님의 모습이라고. 나 역시 그분들의 뒷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보았다. 그분들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의 내 모습을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공허함을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안정을 위해 불안정을 견디며 달려온 끝에 정작 안정이 찾아왔을 때, 나는 다시 불안정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열망하는 일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엔지니어라는 옷은 내게 너무나 맞지 않았다.
나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1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미래의 내가 "그때 참 잘했다"라고 웃으며 말해줄 수 있도록,
나는 10년 다닌 회사의 명함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