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라는 마약을 끊은 퇴사자가 마주한 서늘한 경제적 현실 4가지
사원증을 반납하고 야생으로 나오자마자, 자본주의는 기다렸다는 듯 냉혹한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퇴사 후 마주하게 되는 사회적 시선이나 시간의 주도권 같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은 잠시 미뤄두자.
당장 내 통장에 꽂히던 '월급'이라는 달콤한 마약이 끊긴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철저한 자본주의의 셈법 앞에서 내가 직접 체감한, 그리고 뼈저리게 당황했던 경제적 변화들을 정리해 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4대 보험이다. 직장인일 때는 월급 명세서에서 스쳐 지나가는 숫자였지만, 소속이 사라지는 순간 이 녀석들은 꽤 무서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국민연금
직장인일 때는 사업주가 절반을 내주었지만, 퇴사 후 소득이 0원이 되니 당장 빠져나가는 돈은 없다.
하지만 노년에 연금을 받으려면 최소 가입 기간 '10년'을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다행히 나는 이 악물고 10년을 버틴 덕분에 간신히 수급 자격은 건진 상태였다.
만약 이 기간을 못 채우고 퇴사했다면, 최소 금액(현재 9만 원 선)으로 임의가입을 하거나, 훗날 60세 이전에 모자란 기간을 목돈으로 '추후 납부'해야만 한다.
연금 수령 이전에 어떻게든 10년을 채우지 못하면, 그동안 부은 돈은 쥐꼬리만 한 이자가 붙어 일시금으로 반환될 뿐이다.
(물론 이직을 통해 다시 직장가입자가 되어 나머지 기간을 채우면 문제는 없다.)
건강보험료
가장 무서운 건 건강보험료(건보료)다. 이 역시 사업주가 50%를 부담해 주던 든든한 방어막이 사라진다.
다행히 나는 아내의 해외 발령으로 중국에 거주 중이라 '해외 체류 신고'를 통해 당장의 건보료는 부과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발생한다.)
하지만 한국에 남는 일반적인 퇴사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국민연금과 달리 건보료는 소득이 0원이라도 부과될 수 있다. 맞벌이 부부여서 퇴사 후 배우자의 밑으로(피부양자) 들어가려 해도 깐깐한 심사가 기다리고 있다.
사업소득이 있거나, 금융소득(주식 배당, 예금 이자 등)이 기준을 넘거나, 내 명의의 부동산 자산(재산세 과표 기준)이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얄짤없이 지역가입자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30만 원을 냈던 사람이 퇴사 후 근로소득이 끊겼음에도, 기타 소득과 집, 차가 더해져 60만 원 이상을 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퇴사 후 가장 뼈를 때리는 타격은 대출에서 온다. 은행은 나의 거창한 꿈이나 열정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안전한 직장인'에서, 상환 능력을 상실한 '요주의 고객'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신용대출
코로나 이전 저금리 시절, 나는 꽤 넉넉한 한도로 신용대출을 받아 매년 연장해오고 있었다. (과거엔 지금보다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대출 연장 심사 시 가장 중요한 서류가 '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영수증'이다.
무소득자가 되는 순간 한도가 대폭 삭감되거나 아예 연장이 거절된다. 나같이 이직이 아닌, 완전한 퇴사라면 일부 상환조차 막막해진다. 따라서, 퇴사를 결심했다면 만기일을 반드시 확인하고 삭감될 금액만큼의 현금을 미리 쌓아두어야 한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 등으로 무소득자 대출을 받을 순 있지만 금리는 가혹하다. 내가 썼던 넉넉한 신용은 내 능력이 아니라, 따박따박 월급을 주던 '직장'이라는 울타리의 신용이었음을 서늘하게 깨닫는 순간이다.
주택담보대출
주담대 앞에서도 자본주의의 셈법은 냉혹하다.
현재 규제상 가구 합산 소득의 40%까지만 원리금 상환액으로 쓸 수 있다. (실제로는 스트레스 DSR 적용으로 더 적다.) 퇴사 전 나는 아내보다 소득이 높았는데, 나의 소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니 가구 합산 소득이 반토막 났다. 당연히 앞으로 받을 수 있는 대출 규모도 절반 이하로 쪼그라든다.
결국 이사나 부동산 투자를 계획 중인 사람이라면, 내 명함에 번듯한 소속이 적혀있을 때 대출을 실행해 두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다.
눈에 보이는 월급 외에, 회사가 내 삶의 지출을 막아주기 위해 쳐두었던 보이지 않는 방어막들도 모두 걷힌다.
나의 경우 회사에서 일정 기간 사택을 지원받았다. 만약 내 돈으로 직접 월세를 구해야 했다면 꽤 큰 고정 지출이 발생했을 테니, 든든한 경제적 혜택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셈이다.
그 외에도 알게 모르게 누리던 복지들이 있다. 책 구매비, 자기계발 교육비 지원, 저렴한 제휴 숙소 등. 일상에 너무 스며들어 있어 내 돈인 줄 알고 썼던 것들을 막상 내 순수 자비로 결제하려니, 결제창 앞에서 손가락이 멈칫했다.
'아, 이것도 회사의 돈이었구나.'
그제야 씁쓸한 자각이 든다.
우리사주 절세 효과나 사내 생활안정자금 같은 혜택도 무시 못 할 방어막이었다.
숨 막히는 지출 명세서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지갑에 '+'로 찍히는 항목이 있다. 퇴직금이다.
나는 10년 치의 퇴직금을 일시로 수령했다. IRP(개인형 퇴직연금) 계좌로 들어온 이 돈을 연금으로 굴릴지, 세금을 내고 당장 일시금으로 찾을지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일시금을 택했고 약 5% 정도의 세금을 뗐다.
'연분연승법'이라는 계산 방식 덕분에 한 번에 큰돈을 받아도 매년 나눠 받은 것처럼 세금을 계산해 주고, 근속연수 공제 등도 들어가서 생각보다 세금 폭탄을 맞진 않았다. 결국 떼어가는 세금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라에서 10년의 노동에 대해 '최소한의 배려'를 해주는 것 같아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이 외에도 맞벌이 부부로서 받던 나라와 지자체의 혜택들이 '외벌이'가 되며 끊어지는 등 자잘한 변화들은 끝이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계산기를 두드리다 보면, 사람들이 왜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도 끝내 꺼내지 못하는지 뼈저리게 이해가 간다.
회사를 다니며 자금을 모아 결혼을 하고, 대출을 일으켜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나면, 가구의 고정 지출은 이미 팽창할 대로 팽창해 있다. 이 숨 막히는 궤도 위에서, 매월 25일 통장에 꽂히는 '월급'이라는 마약을 단칼에 끊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나 또한 오랜 시간 이 자본주의의 족쇄에 발목을 잡혀왔다. 그것이 기질에 맞지 않는 꽉 끼는 옷을 입고도 무려 10년을 악착같이 버텨온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퇴사 전 나름대로 철저하게 계산하고 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야생의 현실은 늘 계산보다 팍팍했고 예상치 못한 청구서들은 항상 '지출이 늘어나는 쪽'으로만 날아왔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냉정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수백 번 퇴사의 손익계산서를 두드려 보았다 한들, 막상 야생에 나설 때는 그 결과값보다 반드시 한 단계 더 보수적으로, 더 지독하게 현금을 쥐어짜 두고 나서야만 한다. 그것이 사원증을 반납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가장 서늘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