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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별 게 다 부끄러운 사람이어서 좋아.

by ondo

출산하고 내 갑상선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소파에 앉아 갓난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뿐인데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내쉬는 걸 들은 엄마가 병원에 속히 가보라고 했다. 어쩐지 목 앞쪽도 불룩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맘때 나는 집에서 아이를 안아서 재우고, 때마다 분유를 타는 것만으로도 매우 지치고 피곤했다. 내 등에 옷걸이 같은 게 달려있어서 누군가 날 일으켜주고 앉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런데 아기를 갓 낳은 여자들이 다 그 정도는 피곤하고 고된 줄로만 알았다. 역시 애 낳는 게 힘들다더니 다시는 못할 짓이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피검사 결과를 본 의사가 심각해진 얼굴로 내 갑상선의 항진이 심하다고 했다. 모니터에는 환자로서는 알 수 없는 숫자와 영문으로 된 수치들이 표로 칸칸이 정리되어 있었다. 의사는 모니터를 내 방향으로 돌려 빨간색으로 체크된 수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갑상선에서 호르몬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분비되고 있다고 했다. 정상 범위의 4~5배가량 뿜어내고 있으니 지금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단거리 달리기 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호흡이 더 가빠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슬픈 게 아니라 마침내 내 육체적인 고통을 과학적인 수치로 이해하고 알아봐 준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과 안도감이었다.


의사는 스무고개를 하듯 나를 전방위로 몰아가며 점쟁이처럼 내 증상을 딱딱 맞췄다. 벗어나는 질문이 하나도 없어서 무력해진 기분이었다.


변을 자주 보는 편이죠?

네.

머리도 많이 빠지고 또 빨리 나죠?

네.

몸이 막 덥고 땀도 많이 나고 짜증도 무진장 많이 나지 않아요?

네.

참 성격도 어지간히 무던한가 봐. 이 정도 수치면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리고 잠도 안 왔을 텐데.

… 선생님, 저는 애기 낳고 공황장애가 온 줄 알았어요. 여기 오기 전에 정신과를 갔었어요.


이 병원에 가기 몇 달 전에 가만히 서있어도 호흡이 가쁘고 몸이 떨려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인줄 알고 정신과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정신과 의사는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호흡이 잘 되지 않을 때 공황장애 약을 먹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 약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위로를 받았으므로 실제로 먹진 않았었다.


나는 피검사로 내 몸의 어디가 고장 났는지, 그동안 어떤 증상이 날 괴롭히고 불편하게 했을지 부채도사처럼 딱딱 알아맞히는 의사에게 완전히 기대는 마음으로 5년 동안 같은 병원에 가서 같은 의사를 만나고 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피를 네 통씩 뽑고 호르몬 수치며, 간 수치, 백혈구 수치 등을 점검받고 적절한 약을 처방받아 내 목에 사는 나비를 소중히 관리는 중이다.


5년 동안 약으로 관리해 정상 수치에 든 적은 딱 두 번인데 재발이 잦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계절이 바뀌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김없이 갑상선은 호르몬을 더 많이 방출하곤 해서 나는 의사의 정상이네요,라는 말에도 마냥 스스로 축하하지 않는다. 나의 갑상선은 언제라도 흥분하고 화를 낼 수 있으니까 약으로 살살 달래 가며 명상을 자주 해야 한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작은 고모가 나와 같은 병을 앓았는데 아마도 유전적인 요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나는 평생 이 병을 안고 살 마음을 먹고 있다.


지금도 정상 수치보다는 경미하게 높은 수준이라서 매일 메티마졸을 한 알씩 먹고 있다. 운동이나 식이, 나의 노력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인데 이 병에 기막히게 적중하는 약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약을 개발하느라 애쓰고 부작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실험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과 영문을 모르고 희생당한 동물들에게도 무한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난주 금요일 정기적인 피검사 결과를 보러 가는 날이라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면 기계로 수납을 하고, 예약 확인을 한다. 몇 달 전까지 수납이나 약 처방전 발행만 기계로 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방문 알림도 그렇고, 몸무게, 키, 혈압 측정도 기계로 하도록 되어있었다. 전에는 내 혈압 수치가 종이로 출력되면 그 뒷면에 이름과 몸무게를 적어서 간호사에게 직접 제출했었다. 모든 과정은 나름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나는 몸무게는 물론이고 내 혈압조차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대기하는 사람이 없는 진료과 앞 측정기를 일부러 찾아 측정을 했었다. 내 뒤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대면 심장이 펌프질을 심하게 했다. 그러면 혈압 측정기계가 갑자기 왜 이러냐고 삐삐- 소리 지르며 오류가 나버렸다.


내 기준엔 혈압 수치도 매우 사적인 영역이라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혈압이야 120이 넘으면 고혈압이고, 80 이하면 저혈압 아닌가. 남의 혈압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몰개성인 수치인데 나는 이상하게도 혈압조차 몸무게처럼 꽁꽁 비밀로 유지하고 싶다.


측정기계 앞에 선 사람들 중 나와 연령대가 비슷한 이는 없었다. 70대 노인이 주된 환자였다. 노인들은 접수대 앞에 앉은 선생님들이 하라는 대로 키와 몸무게를 재고 혈압을 쟀다. 그들의 몸무게와 키와 혈압은 자동으로 접수대에 넘어갔다. 거기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지치고 조금은 성급한 얼굴을 한 채로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환자들은 고분고분 각자의 몸과 혈압을 측정하기 위해 기계 앞에 줄을 섰다.


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진료과를 빙 둘러보았다. 새로 들인 기계의 조작을 돕는 봉사자가 내 팔을 잡고 줄을 세웠다. 나는 봉사자가 다른 환자에게 눈을 돌리는 사이 줄에서 벗어났다. 내분비내과 옆 신장내과 구석에 구식 혈압 측정계와 체중계가 놓여있었다. 나는 곁눈으로 눈치를 보다가 샤샤샥 빠른 걸음으로 혈압 측정계 앞에 가서 동그란 의자에 앉아 혈압을 쟀다. 아무도 내 뒤에 서성이지 않기를 바라며 신발을 벗고 체중계 위에도 올라갔다.

혈압 측정계가 혓바닥처럼 내민 종이 뒷면에 이름을 적고 몸무게를 작게 적어 접수대 간호사에게 건넸다.


자동 측정기 있는데 거기서 안 재셨어요?

... 네에.

저기서 재시면 자동으로 넘어와요. 이렇게 수고스럽게 따로 안 내셔도 되는데. 다음엔 저기서 하세요.

저는 좀 부끄러워요. 사람들이 다 보는 게 부끄러워서.


그제야 간호사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저희도 (수고스럽게) 입력을 직접 해야 하거든요.

죄송해요.

키가 어떻게 되세요?

배.. 액.. 유…. 욱... 시…


나는 입을 최대한 벌리지 않고 작게 속삭였다. 간호사의 미간이 좁혀져서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네? 크게.

백.. 육…십...

네. 저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나는 왜 이렇게 이런 게 부끄러울까. 성인의 몸무게나 키는 하늘에서 보나 땅에서 끌어당기는 중력으로 보나 거기서 거기인데 나는 뭐가 그렇게 특별히 유난스럽게 남에게 보이는 게 부끄러울까. 더구나 여긴 병원이다. 사람의 개인성이나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고 살덩이와 피, 수치로 구별하는 병원이라 이곳에서 종사하는 사람에게 나는 키 160에 몸무게 51인 갑상선 항진증 여성 환자일 뿐인데.


나는 시모에게 종종 너는 부끄러운 것도 많다. 애도 낳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애를 낳으면 부끄러운 게 많이 사라지나. 애를 낳는 건 여성으로서 최전선에 서는 그런 것일까. 그런데 나는 애를 낳은 사람인데 왜 변한 게 별로 없을까. 이런 생각에 젖어들 때쯤 시모가 혼잣말을 하듯 덧붙인다. 부끄러운 게 많을 때가 좋은 거다. 부끄러운 게 있을 때가 좋을 때지,라고.


아직은 부끄러운 게 많아서, 나이 든 여자가 보기에,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기에 별 게 다 부끄러운 사람이 나라서 좋다. 감추고 싶은 게 많다는 건 나의 개별성을 잃지 않고 싶다는 거니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나는 부끄러운 걸 잃지 않고 늙고 싶다고 오늘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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