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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do Nov 13. 2024

1991년

선 넘는 가족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매년 여름휴가철에 여행을 떠났다. 동해의 여러 해수욕장부터 설악산, 오대산, 완도, 땅끝마을, 보길도까지.


그때는 유급휴가 제도가 있어도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회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은 ‘전 국민 공식 휴가’ 기간이 되어야만 2~3일 정도 시간을 내어 피서를 떠날 수 있었다. 그래서 7월 말, 8월 첫째 주가 되면 피서지로 통하는 주요 고속도로가 전국에서 모여든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방송 기자들이 매번 취재를 나가지 않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그때’만 되면 비슷한 그림이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헬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꼬리 문 차량의 행렬과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 운전자들,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


90년대만 하더라도 에어컨을 구비해 놓은 집이 흔치 않았다. 그래서 여름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수영장으로 계곡으로 피서를 떠났다.

온 국민의 '공식 바캉스 기간' 전에 이른 더위가 찾아올 땐 나와 동생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동네 근처에 있는 전화국 같은 델 가서 앉아있다 오곤 했다.

당시에 공공기관이나 은행에는 에어컨이 있었기 때문에 우두커니 일없이 앉아 있다가 땀이 식으면 집에 돌아왔다.


동생은 접객용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아 다리를 맥없이 흔들며 혼잣말로 떠들었고, 나는 가판대에 있는 잡지들, 관공서 홍보책자 같은 걸 꺼내보며 시간을 때웠다.

할머니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데도 연신 부채질을 하며 옷섶을 펄럭거렸다.  


“어르신, 저희 영업 마감 시간이라서요.”

“애기야, 그 책은 애기가 보면 안 되는 책이야.”

“죄송하지만 손님이 많아서요. 비켜주시겠어요?”

이런 말을 창구 직원들에게 듣곤 해서 나는 우리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 불청객인 걸 진작에 알았지만 그때 나는 할머니에게 창피해서 가기 싫다고 말을 못 했다. 싫어도 어차피 가게 될 걸 험한 소리 듣고 갈 바엔 잠자코 따라가는 편이 나았다.  


어린이도 체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렸고, 자라는 중이어서 어른 앞에서 내 생각에는 무게가 없고, 말에는 힘이 없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


전화국으로 가는 길엔 새카맣고 털이 부숭부숭한 송충이들이 수두룩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툭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이 미끄덩하고 미끄러지면, 아래를 내려다보고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깨금발로 뛰어다녔다.


한국전쟁 때 불과 대여섯 살이었던 아빠가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은 건 죽음의 공포가 아닌 인분의 공포라고 했다.

엄마 손을 잡고 피난을 내려올 때 발 디딜 틈 없이 지천에 깔린 무수한 인간의 똥들. 그 그림이 60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 남는다고 했다. 나에게는 송충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살아 꿈틀거리는 것도, 죽어 짜부라진 것도 진저리가 나는 그즈음 여름날의 기억.


휴가를 떠날 땐 미명인 새벽 5시쯤 출발하곤 했는데 일찍 떠나든 늦게 떠나든 정체 구간은 피할 수 없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 하나라 거쳐야 하는 데는 거쳐야 했으므로.

도로 중간에 임시 입간판을 세워놓고 뻥튀기나 술빵을 파는 행상객이 보이면 정체 구간의 시작이었다.

상인들은 거북이걸음으로 지나가는 차의 창문 틈새로 주전부리를 쑥 들이밀고 물건값을 제멋대로 흥정하기 일쑤였다.


나는 전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혼자 모든 가족의 짐을 꾸린 엄마가 출발 전부터 잔뜩 날이 서있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 없는 상인이 엄마에게 괜한 말을 걸어 시비가 붙을까 봐 배가 아프고 침이 꼴딱 넘어갔다.

그래서 저 멀리 커다란 뻥튀기 봉지가 보이면 창문 레버부터 황급히 돌렸다.

혹여나 드센 행상객이 엄마 얼굴에 무작정 뻥튀기를 들이밀지 않기를, 엄마가 그에게 뭐라 쏘아붙이지 않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며 그 길을 지났다.

 

그렇게 가다 서다 무슨 영문인지 차가 완전히 서버리면 아빠는 차문을 열고 나가 담배를 태웠다. 앞차의 운전자도 차 지붕을 짚고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가 차들이 영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면 시동을 끄고 갓길에 돗자리를 폈다.

아무리 이상한 행동도 둘셋이 하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된다.

앞 차, 그 앞 차, 또 그 앞 차에 탄 가족들이 우르르 차에서 내리니 우리 가족도 내려서 다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엄마는 트렁크에 있는 아이스박스를 열어 쌀과 라면, 김치, 마른반찬 같은 걸 꺼냈다.

그리고 휴대용 버너에 올린 냄비밥에 뜸을 들이면서, 우리 가족 앞뒤로 앉은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을 나누어주고, 또 그 집의 반찬들을 받아왔다. 깻잎장아찌, 멸치볶음, 양념된 진미채 같은 것들을.

 

우리 집은 전국 각지를 다니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의 여가 개념이 아닌, 부모님 두 분이 여행을 무엇보다 좋아해서 ‘어떻게든’ 가는 것, 그게 우리의 여행이자 집 떠나는 의미였다.  

그래서 숙박비가 나가는 호텔, 모텔이 아닌 6인용 텐트가 우리의 이동식 숙소가 되었다.

산을 가든 바다를 가든 항상 텐트를 가지고 다니며 잠을 잤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텐트를 바닥에 펼쳐내어 “도대체 어디가 앞이지?”, "뱀 나오겠다. 백반 가져왔지?”, “밤에 비 온대. 둘레에 도랑을 좀 파놔야겠어.” 이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이동식 집’을 만들어가는 아빠의 등을 망연히 바라보는 게 좋았다.




1991년 여름 휴가지는 남해였다. 우리가 눌러앉는 곳이 곧 숙소가 되었기에 어느 동네, 어느 야영지가 아니라 땅끝마을을 목적지로 두고 지도를 보며 길을 떠났다. 내비게이션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던 때에.


땅끝마을 근방에 이르자 아빠는 한적한 데에 차를 세운 뒤 보닛 위에 커다란 접이식 지도를 펼쳐 놓고 오늘 하룻밤 묵을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그러지 말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길을 물어보라고 해도 아빠는 가만있어 보라며 지도만 뚫어지게 보았다. 아빠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걸 싫어했다. 보다 못한 엄마가 마을 입구에 서있는 몇몇 촌로에게 “어르신,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하고는 길을 물었다.


우리는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가 결국 부두와 맞닿은 어느 관광호텔 앞에 텐트를 쳤다. 빌라 한 동 규모의 호텔이었는데 해풍의 영향으로 부식이 되었는지 네온사인 간판에도 붉은 녹이 슬어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마땅한 야영지를 찾지 못했던 터라 호텔 앞을 하룻밤 묵을 곳으로 정했다. 호텔의 사유지일 법한 공터에.

호텔 앞에 텐트를 치는 사람들이라니.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거기였을까?


지금은 상식이 아닌데 그때는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희미하고, 선 넘는 일이 사람 사는 정으로 통하던 때였다.  

우리는 호텔 로비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썼다.

호텔 정문 우측에는 학교 운동장 수돗가처럼 만들어 놓은 석재 수도 시설이 있었는데 엄마는 거기서 쌀을 씻어 밥을 했다.


나는 그때도 그만저만한 눈치는 있어서 혹시나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사장이 뛰쳐나와서 뭐 하는 짓이냐고, 당장 나가라고 할까 봐 노심초사였다.

그래서 내 마음과는 반대로, 최대한 호텔 숙박객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로비를 오갈 때 허리, 어깨는 곧게 펴고 눈에 힘을 준 채로 호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의 눈 맞춤을 부러 피하지 않았다.


늦은 저녁밥을 해 먹고 텐트 안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뜰 무렵 아빠는 일어나서 동생을 깨웠다. 그 무렵 아빠는 바다에 가면 아들과 낚시를 했다.

낚싯대를 드리운 지 얼마 안 돼서 두 사람은 문어와 게를 잡았는데 엄마는 산 채로 그것들을 끓는 물에 넣어 된장찌개를 끓였다.

윤기가 반지르르하고 적당한 찰기로 쫀득이는 쌀밥에 해물 된장찌개 한 수저를 떠 넣고 쓱쓱 비빈 달큼하고 시원 짭짜름한, 꽉 찬 ‘육각형’의 맛.

 

우리 가족이 오로지 섭식에 열중하며 이 맛은 ‘내가 잡은 오징어 덕분'이라느니 '아빠가 잡은 게가 감칠맛을 낸 덕분'이라느니 투닥거릴 때 동생의 앉은자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어디서 오셨어요?”


나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팔짱을 낀 남자가 오른손으로 면도 자국이 거뭇한 턱을 매만지며 우리의 허술한 아침상을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는 긴팔 셔츠에 긴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닷바람마저 끈적한 이 한여름에 털이 난 인간의 신체를 그런 계절감에 맞지 않는 옷으로 덮어도 충분히 괜찮은, 그 여유와 한가로움이 그의 풍요로운 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저희 서울에서 왔어요.” 아빠가 대답했다.

그때는 아랫 지방의 식당 같은 델 가서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서울 양반’이라고 하면서 밥도 더 주고, 반찬도 넉넉히 주던 때라 경기도 변두리에 살던 우린 처음엔 '서울 근방 경기도', 그다음엔 '서울 근방'이라고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이어지는 질문이 번거롭기도 하고, 양반 대접이 물색없이 좋아서 그냥 '서울'이라고 대답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어요?  간 밤에 주무실 때 괜찮으셨어요? 바닷바람이 만만찮아서."

“호텔 사장님이세요?”

“예예."

“저희가 신세를 졌네요.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이제 밥 먹고 막 일어설 참이었습니다.”

“아니 왜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좀 더 머물다가 가세요. 이 마을이 이태리의 나폴리 같은 곳이에요. 천천히 마을 한 바퀴 돌아보시고 오세요. 그리고 이 수돗가도 저희가 여행객들 쓰시라고 만들어 놓은 거예요. 편하게 쓰시면 돼요.”


사장의 머리 뒤로, 쏟아지는 햇빛이 부서지며 그의 몸에 완려한 아우라를 빚어냈다.

나는 이 사람이 이제 우리 가족을 ‘피의자’ 심문하듯 마구잡이 취조를 시작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을 뒤엎는 그의 태도와 말에 사뭇 놀랐다.

자꾸만 입이 벌어져 입안에 가득 찬 밥알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다.


‘선 넘는 가족’에게조차 조건 없이 베푸는 그의 아량과 여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다정한 마음의 출발선이 어디일까 생각하며, 나는 호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선량한 마음. 자기 것을 ‘침범’한, 나와 상관없는 이들에게조차 셈 없이 베푸는 후한 마음.

그가 우리에게 버럭 성을 내며 밖으로 내몰아도 우리는 응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엔.


외지인을 어떠한 연도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주었던 그를 떠올리면, 어둡고 누추한 나의 시간에도 빛이 드는 기분이다.


그래, 내 인생에서 이런 사람도 있었지? 그러니 앞으로 다 나아가보자. 괜찮아.


다정한 타인을 만났던 시간은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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