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원자들
“이거 진짜 우리 차야?”
매끈하게 쏙 빠진 은색 르망이 우리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나는 차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차 지붕에 손을 얹고 다리를 엇갈려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아빠의 어깨가 봉긋 솟아있었다.
그땐 자가용이 있는 집이 몇 집 건너 하나였다.
명절 귀성길이나 여름휴가 때에도 온 가족이 짐을 이고 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시절이니, 집에 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느닷없이 벼락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가 마침 추석 즈음이라 온 가족이 할아버지 성묘를 가는 일로 '가족 시승'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할아버지를 모신 분묘는 선산인 판교에 있는데 그때는 분당 신도시 계획 발표가 나기도 전의 일이라 마을 주변 풍경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 ‘판교동’은 오이밭, 참외밭이 들판에 이어진 촌맛 가득한 시골길이었다.
노면이 제대로 된 길도 아니어서 성묘를 가려면 안전 펜스도 놓이지 않은 구불구불한 1차선 도로를 지나야 했다.
성묘 당일이 되어 운전석에는 아빠가 앉고, 보조석에는 엄마가 두 살 된 남동생을 안고 탔고, 뒷자리에는 할머니와 내가 탔다.
그때는 자동차를 타면 안전벨트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나라에서 ‘안전제일주의’ 선전의 일환으로 안전벨트 캠페인을 꾸준히 벌이긴 했지만 곧이곧대로 안전벨트를 매는 사람이 오히려 유난스럽다는 인식이 있었다.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찾는 사람은 제 운전 실력을 못 믿겠냐는 운전자의 핀잔을 들으며 꽤나 무안을 당하던 때였다.
차가 급정거를 하면 뒷좌석에 누워있던 사람은 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헤드 레스트를 잡고 서서 엉덩이를 흔들던 애들은 뒤로 발랑 나자빠지던 그런 때였는데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운전자는 무심히 ‘똑바로 앉아.’라고 할 뿐 아무도 안전벨트를 매라고 야단하지 않았다.
앞 좌석에는 아이를 태우면 안 된다는 의식은 당연히 없었을뿐더러 카시트는 아예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이러한 식의 좌석 배치는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우리 가족은 독실한 구교, 천주교우의 집안으로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기는, 기복적인 신앙에서 삶의 양식을 구하던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날 불운의 확률은 기도의 힘 앞에선 무용에 가까웠다.
우리는 차에 오르자마자 대시보드를 손으로 훑고, 닭다리처럼 생긴 수동식 창문 레버를 휙휙 돌려보면서 차구경을 시작했다.
1시간 가까이 달리다 보니 새 차에 대한 감흥은 사라지고 온 가족이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터라 운전도 미숙했을 것이다.
멀미를 한 동생이 바닥에 쏟은 토 냄새가 새 차 냄새와 뒤섞였고, 구불구불한 길에 진입하면서부터 나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얼굴에 찬 바람을 쏘여도, 엄마가 ‘멀미예방약’이라며 건네준 인삼사탕도 효과가 없었다.
도돌이표로 재생되는 느리고 가사 없는 연주 음악, 자비 없이 협소하고 울퉁불퉁한 도로 상태. 차 안팎의 모든 상황이 구토를 유발했다.
“엄마, 나 토할 거 같아. 차 세우면 안 돼?"
이게 우리 집의 첫 차, 르망 안에서 중얼거렸던 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사진처럼 남은 단편적인 기억들.
‘빠아아앙-’
아빠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던 차를 피하려고 핸들을 급히 꺾은 것.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
아니, 차가 공중으로 부웅- 날았던 것까지.
마치 슬로모션처럼.
‘콰아아앙!’ 대포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엄청난 진동.
엄마의 신음소리가 섞인 다급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어으으…빨리…차 밖으로 나가야 돼… 일어나!”
눈의 깜빡임 사이사이 본넷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보였다. 마치 수증기로 인해 욕실 거울이 뿌예진 것처럼 한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깜빡깜빡.
옆으로 눈을 치켜뜨니 하늘과 맞닿은 듯한 저 위 1차선 도로에 차를 줄줄이 세워놓고 밑으로 뛰어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파르게 경사 진 내리막길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옆으로 튼 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
비 오는 날 흙이 싸르륵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입술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따뜻하고 끈적한 액체의 느낌, 쇠 냄새, 아득히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 차를 둘러싼 사람들의 희미한 얼굴들.
“애기야! 정신 차려봐!"
“아저씨, 애를 그냥 업어요!”
“그래도 살았네요.”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저 먼 데서 아득히 들렸다. 낮게 깔리는 웅웅 거리는 말소리가 의식 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우리가 안 죽어 다행'이라며 숨을 크게 내쉬었던 남자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남자의 쿰쿰하고 시큼한 땀냄새, 머리 기름 냄새, 미지근하게 젖은 등에 몸을 맡긴 채로.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실이었다.
물 비린내와 락스 냄새, 소독약 냄새가 몰칵 풍겨오자 나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듯한 차가운 천장의 형광등 불빛, 점박이물범의 몸빛처럼 그려진 천장의 점무늬를 눈으로 좇아 삼각형, 사각형으로 만들어가며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천운이네요. 그 높이에서 차가 굴렀는데 이 정도로 다친 건 기적이에요.”
의사는 차트를 들고 무언가를 끄적이며 병실에 누워있는 식구들 중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식구 중에 누구라도 하늘나라에 갔다면 그날 밤 9시 뉴스에 나올 만한 큰 사고였다.
가족 다섯 명이 탄 차가 성묘를 가는 길에 낭떠러지에 가까운 절벽에서 떨어졌고, 사고 난 길은 대형사고가 잦기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사망자가 있었다면 아마 뉴스거리가 됐을 것이다.
엄마와 나는 피부 몇 군데를 봉합하는 정도였고, 당시 세 살이던 동생은 얕은 찰과상에 불과한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차가 떨어질 때 엄마가 동생을 꼭 끌어안아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차 밖으로 튕겨 나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핸들에 가슴이 처박힌 아빠가 장 파열로 중상이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교통계 경찰관이 찾아와 거기서 사고 난 사람들 중에 살아나간 사람들은 처음이라고 기적이라고 했다.
우리 집이 겪은 교통사고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집안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큰 사건인데 이상하리만치 지금껏 아무도 이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없다.
부모님도, 고인이 된 할머니도 생전에 이에 관해 한 마디도 없었다.
모두가 잊은 것처럼, 아니 같은 꿈을 꾸었던 것뿐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암묵적으로 침묵을 요하는 불편한 일이거나 상처를 되살리는 일이 아닌데 왜 모두들 이 커다란 사건에 대해 몇 십 년간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죽은 사람도, 후유 장애가 남은 사람도 없고, 병원비가 큰 빚으로 남은 것도 아닌데.
혹시 그즈음이 행복하지 않던 때여서, 그때 그 사고를 떠올리면 줄줄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질 수밖에 없는, 연상되는 어떤 과거의 기억 때문일까?
한 사건을 함께 겪었고, 그때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기억은 모두 다른 것이리라.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아직 말꼬가 트이지 않았던 동생조차 그때 기억의 낱낱의 퍼즐 조각은 같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이 사건이 충격이었을지언정 나쁜 기억은 아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던 생면부지의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진다.
도로에 일렬로 차를 세워놓고 급히 피난 내려가는 사람들처럼 절벽 같은 낭떠러지를 뛰어내려오던 수많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
번쩍이고 날카로운 것들로 가득한 진료실에서 잔뜩 오그라들어있을 때 내 머리뼈가 찍힌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넌 해골은 참 예쁘다?”라고 이상한 농담을 건넨 의사.
사고로 찢어진 윗잇몸을 봉합한 뒤 금식 중인 내게 “며칠만 참아. 언니가 너 금식 끝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약속.”이라고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밀던 간호사.
저녁 밥이 배식될 무렵 병원 복도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엷은 오렌지빛 노을과 포근한 공기.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의 경계 없는 인사와 가벼운 이야기들, 작은 희망이 깃든 웃음소리들.
병원 풍경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복도와 다른 이들의 병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내 가족의 일과 병원일, 다른 환자의 일에 물색없이 참견을 하면서 우리 가족의 울타리를 넓히곤 했다.
불행한 사고 뒤에 일상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었을까?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재미와 기쁨을 느낀 것처럼 나는 병원에서의 생활을 분별없이 즐겼다.
어른들은 아마 내가 이런, 사람의 정을 병원에서 느끼는 틈에 사고 후처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아픈 몸으로 입원비와 수술비를 감내하느라 원무과에 들락날락하고, 조사 나온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가해 차량을 찾고, 애들을 보살피고, 회사일을 처리하고, 멀고 가까운 친인척들의 방문과 전화를 밤낮없이 받아들이는 일들.
복잡하고 건조한 현실의 일을 처리하느라 내 한 켠에는 낭만의 이름이 붙은 그때 그 사고를 어른들은 완전히 달리 기억할지 모른다.
내가 어른이 되어 보니 그리 짐작을 하는 것이다.
1988년, 그때 우리 가족을 살리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무작정 달려왔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의 생명을 구했던,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던 그 사람들을 기억하며 나의 1988년은 꽤 특별했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어디서든 나와 스쳐간 인연일지 모르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의미가 되었다고.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이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나는 이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어디선가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는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