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마음의 빚이 있어, 김지은
김지은은 쉬는 시간마다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어 읽었다. 소설이나 시집, 교양서, 만화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애는 책을 읽으러 학교에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읽기에 몰입했다. 짧은 커트머리에 가지런히 내려오는 앞머리, 깨끗한 교복 셔츠의 소매 끝단과 깃, 단정하게 묶인 흰 운동화 끈.
비닐을 뜯지 않은 하얀 지우개 같은 이미지를 간직한 그녀는 말수는 적었지만 한마디의 말에도 밀도와 무게가 있었다. 그 애가 하는 말은 가벼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중학생이 쓰지 않을 법한 표현을 쓴다든가 고급어휘를 자유로이 쓰는 아이라서 애들은 지은이가 뭐라고 말하면 그 말의 의도를 해석하려 애쓰고, 다음에 나올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깊이 천착할 문제지', '명징한 사실이야', '고매하네', '본태가 좋구나', 하는 어려운 말이 그 애 입에서 나오면 우린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많이 알아서 부러 잘난척한다기보다는 그 애의 세계가 그런 차원의 세계라서 쓰는 말이나 생각이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거나 뭘 빌려달라거나 하면 재지 않고 마음을 내어주는 친구였기에 모두들 다가가기 어려워해도 그 애를 좋아했다.
나는 가끔 지은이가 읽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집에서 읽었다. 같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함께 드나든 길이 책 속에 흔적으로 남은 것 같아서, 기뻐서 가쁜 호흡을 몰아쉬곤 했다. 그 아이가 쓰는 어려운 말 중에 매혹적인 어휘가 있으면 사전을 가만히 들춰보는 일도 일상에서 작은 기쁨이 되었다.
나는 그 애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얽히고 싶어서 하고 싶은 말들을 포개어 놓았다가 오랜 시간 고여있던 말들을 조심스레 하나씩 꺼내어놓고 지은이의 얼굴을 살피곤 했다. 그럼 그 앤 나의 말을 소화하고 벼려 좋은 언어로 응답해 주었다. 지은이에게 고이 추린 말을 꺼내고, 응답을 듣는 일이 쌓여갈수록 나는 지은이에게 조금은 다른 친구가 되고 싶었다.
반에서 아무도 지은이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 아이의 교양이라든가 잘 다듬어진 태도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그 애는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는 단단한 심이 마음 한가운데에 박혀있었다. 십 대 아이들이 거칠게 토해놓은 생각과 판단, 마음의 뭉텅이를 단번에 흩트릴 만한 단호함과 주관을 갖고 있는 아이였다. 지은이는. 그런 아이였다.
우리 모두 열여섯 살을 보냈다. 그 무렵 자기 주관을 갖는 일이, 특히 그 주관이 한데 덩이진 주류의 생각과 다를 때 아니라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단언하는 일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우리는 무리에서 배제되는 일만은 절대 막아야 한다고 애를 쓰며 학교생활을 해왔다.
지은이는 큰 소리를 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도 ‘그게 아닐 수도 있어.’ ‘네 생각은 그렇구나. 난 다르게 보는데.’라고 넌지시 말하는 아이였다. 마치 '우리 모두는 60억 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생각은 다 같을 수 없어, 그렇지 않니?'라고 못다 한 말을 눈빛으로 속삭이는 것처럼. 그렇게 말할 때 지은이는 100세 노인 같았다. 책 속 등장인물의 삶을 대신 살아주느라 마음도, 눈빛도 숙성이 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나는 새 학년이 되고, 이 반에 배정이 되었을 때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1년 유급한 언니인, 학교 전체 ‘짱’ 재희 언니가 우리 반에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나는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대응 방안을 강구하느라 밤새 몸을 뒤척였다. 며칠을 못 자고 생각해 낸다는 게 고작 ‘결코 나대지 않는다.’였지만.
새 학기가 되어 실물로 본 그녀는 소문보다 허우대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재희 언니의 몸이 기쁨이나 분노로 출렁일 때 얇은 눈썹 위아래가 파르라니 빛이 났다. 언니는 운동을 한 사람이라 남자라도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고등학교 오빠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찍히면 노티카나 노스페이스 점퍼를 당장 벗어줘야 한다는 둥 여러 이야기가 거치는 입이 늘어날수록 조금씩 변형되어 돌았다. 나는 이 ‘포식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말수를 줄였고, 튀지 않도록 가만가만 발끝을 들고 다녔다.
우리 반에 왜소증을 앓고 있는 미화를 재희 언니가 눈에 들였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힘들이지 않고 놀잇감을 찾은 야수의 번뜩이는 수상한 광채를.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순수하며 무도한 호기심을.
그녀는 쉬는 시간이 되면 미화를 안아서 교탁에 앉혔다. 교복 치마 밑으로 드러난 미화의 다리가 교탁 위에서 달랑거렸다.
재희 언니는 그녀에게 이미 본 쓰임을 잃어버린 컴퍼스를 들고 미화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빠르게 건너 찍는다든지, 자기가 먹던 소보루빵을 미화의 작은 입에 욱여넣으며 즐거워했다. 그 기쁨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신선한 활력이자 속박된 영혼의 탈출구가 되었다.
서커스 단장이 ‘관중’들의 반응을 시시각각 지켜보듯이 재희 언니는 우리를 빙 둘러보며 어서 모두 즐거운 웃음을 터뜨리기를 바라고 기다렸다. 미화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시선을 두었다. 미화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그동안 자기가 잘해왔던 일이고, 지금도 해야만 하는 일인 것처럼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나는 어서 쉬는 시간 마침 종이 울리기를, 어느 선생이라도 복도를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아서 발바닥이 뜨거워졌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미화가 교탁에 앉는 시간이면 우리 모두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야, 그만 좀 해.”
3 분단 맨 뒤에 앉아있던 지은이가 일어나서 3,4 분단 사이로 걸어갔다. 가뿐한 걸음이었다. 순간의 망설임이나 고뇌 없는 발걸음이었다. 지은인 미화를 안아 교탁으로 내려주고, 미화의 손을 잡고 그 아이의 자리로 데려다주었다. 재희 언니가 지은이를 뒤에서 덮칠 듯이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