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도 Jul 31. 2024

우중산책

곤충기에 들어선 5세 아이와 비를 맞다

휴일에 5세 아이와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마치 시계와 눈치싸움을 하는 것 같다.

시곗바늘이 내가 볼 때만 움직이는 것처럼 자꾸만 시간이 늘어진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른 폭염 뒤 내리는 비라 반가운 마음이 컸지만

‘오늘은 집에서 아이와 뭘 하며 지낼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엄마, 밖에 나가.”

“응? 비 오는데? 많이 오는데? “

“괜찮아. 우산 쓰면 되지.”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나들이를 나간다.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없는 산책길이 익숙한지

아이는 ‘비가 와서 나갈 수 없다.’라는 내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집에 있어봤자 봤던 만화를 보고 또 보고 할 테니

그냥 나가기로 한다.


옷 좀 젖으면 어때.

신발이 좀 질척거리면 어때.

오가는 사람도 없는데 우산 쓰고 달리기나 해 볼까?


아이는 신이 나서 아쿠아슈즈를 꺼내 신고는 현관 앞에 선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빨리빨리”를 연달아 외친다.

나는 판초형 우비를 입고, 커다랗지만 가벼운 우산을 들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현관을 나섰다.


“아! 채집통 챙겨야지”

아이가 현관 앞에 둔 채집통을 들고는 그 중요한 걸 또 잊으면 어떡하냐는 책망의 눈빛을 보냈다.


이 녀석은 작년부터 진정한 곤충기(bugs period)를 겪고 있다. 성장통이 아니라 곤충통이라고 해야 할까.

상사병에 달뜬 청년처럼 곤충과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이지만.

아침에 눈떠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제 반려 곤충들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일을 제법 진중하게 해낸다.  

심지어 입에 들어갔던 과자를 곤충 입에 대주며 ‘너 한 입, 나 한 입’ 하고 있다. 진짜 그러고 앉아있다.


우리 집엔 톱사슴벌레, 애사슴벌레, 장수풍뎅이, 달팽이, 사마귀까지.

아니, 매일 기분에 따라 잡아오는 콩벌레, 풍뎅이까지.

그야말로 곤충 하숙소다.

이 군식구들을 위한 부대 준비물도 적잖다. 곤충젤리, 발효톱밥, 놀이목, 특대형(곤충 복지) 사육통까지.  

비 오는 날 나가자는 이유도 아마 새로운 하숙생을 집에 들이기 위해서일 거다. 이미 정원 초과인데.  

어미가 되어보니 어미는 제 자식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비 오는데 곤충이 있을까? 비 오면 곤충도 비를 피해 어디 숨지 않을까? “했더니 “그래도 모르니까 들고 가 보자.”라고 한다.

녀석.

비 오는 날엔 우산조차 큰 짐이 되는데 손목에도 낄 수 없는 채집통이라니. 심히 번거롭다.

그냥 우산 손잡이에 달랑달랑 매달어서 걷기로 한다.


"오늘 비 안 맞게 풍이 우리 집으로 데려올 거야."

아이는 오늘 우중산책의 목적을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전달하고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그렇지.


비가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산책길을 아이는 신이 나서 뛰어다닌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만 찾아서 ‘첨벙첨벙’

신발이 젖고, 바지가 젖고, 온 데가 다 젖었지만

그게 뭐 대수랴.

이렇게 보기만 해도 재미있는데.

아이는 결국 우산을 내려놓고 후드득 내리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았다.

꺄르륵 꺄르륵

아이의 숨 넘어가는 웃음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저 녀석이 배를 잡고 웃으니까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다.


아쉽게도(기쁘게도) 아이가 ‘매의 눈’으로 찾는 딱정벌레과의 곤충은 길섶에서 보이지 않았다.

지렁이만 지그재그 춤을 추며 흙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곤충 '따위' 제 인생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곤충 안 찾아도 괜찮아! 엄마도 우산 쓰지 마 봐. 진짜 시원해.”


아이는 쓰는 둥 마는 둥 했던 우산을 결국엔 휙 집어던지고 냅다 달리기를 한다.


아이는 비 내리는 그 순간, 그 공간 속으로 오롯이 빠져들어 원래 산책의 목적은 이미 잊은 듯했다.


눈이 안 보이게 시원스럽게 웃는 아이의 눈에,

거리낌 없이 비를 맞아들이는 마음의 창문에

오늘 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기를,


절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비를 맞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아날로그식 육아를 지향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