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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3년

서비스가 아니야, 그건 다정한 마음이지

by ondo



다이아나 샤넬백은 필요 없어.

그런데

허니문으로 몰디브를 가고 싶어.

난 그거면 돼.


그는 몰디브가 더운 쌀국수를 먹는 동남아시아 어디쯤이겠거니 짐작하고 아무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속이 깊고 유속이 느린 강물 같은 사람이라 그린란드를 가자고 했어도 하얗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붉은 단풍 나뭇잎 사이로 마른 햇살이 쏟아지는 수련원 경당에서 혼배미사를 올리고 몰디브로 떠났다.

몰디브는 직항이 없어서 스리랑카에서 3시간가량 레이오버했다.

콜롬보의 새벽 공기는 후더분했다. 우린 공항 내에 스민 맵고 들큼한 향신료 냄새에 날연히 빠져들었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몸이 누그러졌다.


무너진 몸을 추슬러 다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30분을 날아 말레(현 벨라나) 공항에 도착했다.

마침내.


탑승교를 통해 활주로에 내려왔을 때 나는 인도 아래, 스리랑카 아래, 적도 부근의 바람을 처음 맞아보았다.

드라이어 열풍 같은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끼다가 땀이 난 얼굴과 목에 들러붙었다.


한국의 10월 옷차림(두꺼운 갭 후드면티와 청바지)을 한 채 계절을 통과한 우린, 서로에게 공연히 날카로운 말을 건넬까 차라리 침묵했다.


공항에서 리조트 직원을 만나 스피드보트를 타고 리조트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16시간이 걸렸다.


몰디브는 섬이 곧 리조트다. 리조트 숙박객만이 ‘그’ 섬에 갈 수 있다.

공항에서 스피드보트를 타거나 수상비행기를 타거나 국내선비행기를 타야 한다.

유순한 그도 도대체 얼마나 남았냐는 물음을 여러 번 삼켰다.


새로운 게스트들을 마중 나온 리조트 직원들이 전통 타악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우린 따뜻한 타월로 얼굴과 손을 닦아내고 씨앗이 오도독 씹히는 시큼한 음료를 마셨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마주 하고 웃었다.


새의 커다란 날개처럼 데칼코마니형으로 펼쳐진 수상가옥의 우측 끄트머리 집이 우리가 일주일간 머물 곳이었다.

바다 위에 둥근 기둥들을 세워 띄워놓은 가옥이 물결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른 짚을 엮어 얹은 지붕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사르륵 소리를 냈다.


신랑이 객실 담당 몰디비안 버틀러가 나가자마자 땀에 전 옷을 벗어던지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하얀 이불을 코밑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처엄벙- 소리를 듣고 나는 새신랑을 의식할 새도 없이 단잠에 빠져들었다.


핑크색 물고기 본 적 있어?

물고기가 산호 긁어먹는 소리 들은 적 있어?

사람한테 무심한 상어 본 적 있어?

잠에서 깨어나 침대 머리에 기댄 채 초콜릿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힘을 내는 내게 그가 말을 잇고 또 이었다.

그가 커다란 타월을 덮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무판으로 조립된 퍼즐식 마룻바닥 위로 바닷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동그란 얼룩이 졌다.


그의 얼굴이 청량한 여름빛으로 반짝였다. 순수한 기쁨을 머금은 그의 미소에 나도 웃었다.


침대에서 나와 폴딩식 창을 열어 밀고 데크로 나가자 바다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이끼와 녹이 낀 나무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기분 좋을 정도로 미지근한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꿀렁꿀렁- 목울대를 다정하게 스치는 작은 파도.


연한 청록색의 물빛이 바다의 색인가 싶어 동그랗게 오므린 손바닥에 물을 퍼올려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면이 수십만 수백만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여서 눈을 뜨기 어려웠다.


나는 커다란 물안경과 스노클을 끼고 오리발을 움직여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둥근 늙은 호박 모양의 산호, 철쭉나무 같은 산호, 자작나무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산호들.

핑크색,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 온갖 유색의 물고기들.

부유하는 먼지들처럼 흩어졌다 모이는 치어들과 바위틈 레몬 만한 구멍에 기어코 몸을 구겨 넣는 문어와

말미잘에 숨어든 흰동가리 같은 관상용 열대어들.


나는 그런 세상은 처음 보았다.

어떤 것도 미화할 필요 없는, 부러 아름답게 지어낼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 완벽한 세상.


마치 두어 시간 영화에 폭 빠져있다가 영화관 밖으로 걸어 나오면 현실 전환이 안 돼 잠시 헤매는 사람처럼

나는 깊은숨을 쉬느라 물밖으로 나왔을 때 도대체 뭐가 현실인지 깨닫지 못해 머릿속이 하얘졌다.


몰디브는 할 일이 없다.

해야 하는데, 봐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없는 곳이다.

작은 섬에서 시간적으로 마음껏 사치를 부린다. 시간을 아낌없이 펑펑 써도 허무하거나 마음이 닳지 않았다.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잤고, 고요한 시간이 무료해지면 열 발자국 계단을 내려가 바다수영을 했다.

특별한 시간이 필요할 땐 배를 타고 선셋 투어를 나가거나 산소통을 매고 수심 6~7m쯤 내려가 다이브 체험을 했다.


행복해,라고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오래 웃었다

사소한 불행이 우리의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걸 깨닫기 전까지.


처음엔 손등 위에 작고 투명한 수포가 하나둘 솟더니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동북아시아에서 받는 해와 적도 부근의 해는 당연히 다르지 않겠냐며, 몸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느 아침에 비키니만 입고 수영을 하다가 정강이가 거칠고 날카로운 산호가지에 푹 찍혔다.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연고를 발랐지만 상처는 더 깊이 살을 파고들었다.

환부 주변의 살갗이 뻘겋게 부어오르고 열감으로 화끈거렸다.


그때 바다수영을 그만뒀어야 하는데

신혼여행은 인생에서 단 한 번 뿐이라서, 그를 바다에 혼자 두기 미안해서 나는 걱정 반 체념 반인 마음으로 바다에 몸을 담갔다.


마지막 날 나는 걷는 게 불편할 정도로 환부에 통증을 느꼈다. 상처를 도려내고 싶을 만큼 가렵고 당기고 뜨거워 어쩔 줄 몰랐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난 어째서인지 숨이 느리고 무거워져서 승무원을 호출했다. 진통제가 필요했다. 이대로 다리를 못 쓰지 않을지, 병원에 가면 의사에게 어떤 중대한 선고를 받는 건 아닐지 걱정이 돼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긴 호리호리한 남자 승무원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내게 왔다.

나는 그에게 아픈 다리를 가리키며 진통제가 있는지 물었고 그는 미소를 거두고는 심각해진 얼굴로 커튼 속으로 들어갔다.


승무원이 사무장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나를 부축해 커튼 너머 비어있는 비즈니스 좌석에 앉혔다.


나는 그들의 권유에 따라 팔걸이에 아픈 다리를 올려놓았다. 사무장이 무릎을 굽혀 피고름으로 흠뻑 젖은 거즈와 붕대를 조심스레 제거한 뒤 새 거즈로 갈아주고 깨끗한 붕대를 여러 번 감아 핀으로 고정해 주었다.


나는 미지근한 물 한 모금에 진통제를 삼켰다. 사무장과 두 명의 승무원이 나에게 눈을 떼지 않고 안위를 살폈다.


“곧 콜롬보에 도착하는데 현지에 연락해서 병원을 알아봐 뒀어요. 경유해서 한국까지 가려면 10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많이 힘드시면 앰뷸런스 대기 시키고 현지 병원에 연계해 드릴게요. 그런데 언어 문제도 있고 의료시설이 열악할 수 있어서 걱정은 되는데...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서울까지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사무장이 내게 물었다.

승무원들의 두 눈이 촛불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걱정하는 마음, 기꺼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 언제라도 내게 내어줄 준비가 된 마음들.


그건 그들이 승무원이라서 내게 제공한 서비스였다고 무심히 말할 수 없다. 절차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낮춰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게 그들의 마음이 닿았기 때문이다.

그건 서비스가 아닌 다정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흐릿하지 않고 선명해서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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