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에서 온 천사들
남편과 늦은 저녁밥을 먹는데 막역한 신부님에게 전화가 왔다. 돌아오는 일요일 아침에 연천에 있는 봉쇄수녀원에서 미사 주례를 맡게 됐는데 시간이 되면 올 수 있냐고 했다. 마침 별다른 약속도 없고, 봉쇄수도원이 궁금하기도 해서 흔쾌히 가겠노라 답했다.
토요일 밤부터 오기 시작한 무거운 눈이 일요일 아침까지 그치지 않고 내렸다. 조수석에 탄 신부님이 성에 낀 창을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문질러 닦아내며 큰 숨을 내쉬었다.
“왜요, 신부님?”
“차가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연천에 진입하자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신부님을 태우고 살얼음이 낀 고속도로를 달리자니 긴장이 되는지 남편은 한 번씩 핸들에서 손을 떼어 청바지 위에 손바닥을 쓱쓱 닦아내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대로에서 벗어나 작은 마을로 진입하자 키 큰 전나무들이 덩이진 눈을 뒤집어쓴 채 길을 따라 줄지어 서있었다. 무거운 눈에 고개를 푹 숙인 가지들이 깊은 겨울잠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낮은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 고샅길에 접어들자 전방 산기슭에 4층짜리 붉은 벽돌집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원은 산이 둥그렇게 품에 안은 형세로 들어앉아 있어 아늑하고도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수도원 진입로는 달팽이가 등허리에 인 집처럼 빙빙 비틀려 들어간 모양새로 나있었다. 남편은 차가 밀리지 않도록 엑셀과 브레이크를 리드미컬하게 밟으며 경사진 길을 올랐다. 눈이 덮여있는 데다 비탈이 가팔라 사륜구동인 남편 차도 오르기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신부님이 현관 앞에서 벨을 눌렀고 우리는 그의 옆에서 응답을 기다렸다. 우리는 건물에서 풍기는 엄숙한 기운에 압도되어 양손을 배꼽 아래에 포갠 채 얌전히
서있었다.
그나 나나 봉쇄수도원은 완전히 생경한 곳이었고, ‘봉쇄’된 구역 안에서 자유의 본질을 찾는 구도자와의 (거리를 둔) 만남 역시 처음이라 조금 초조했던 것 같다.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자그마한 외국인 수녀님이 환히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세요, 신부님. 반갑습니다. 저희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신부님은 수녀님의 환대에 활짝 웃으며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는 남편의 등을 앞으로 살짝 밀어 우리 부부를 소개해주었다.
“제가 잘 아는 친구들이에요. 오늘 미사 같이 하고 싶다고 해서 왔어요. 괜찮죠, 수녀님?”
수녀님이 나와 남편의 손을 꼭 잡고서 정말 잘 왔노라고 온화하고 맑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녀의 해사한 미소가 경계심과 엄숙함으로 뻣뻣해진 마음을 일순간 풀어주었다.
수도원 내부의 경당은 일반 성당의 구조와는 조금 달랐다. 수도자가 머무는 곳과 일반 신자들이 자리하는 곳이 제대를 기준으로 나뉘어 있었다.
봉쇄수도원이기 때문에 원장수녀 외에는 수도자들이 일반인과 직접 대면할 수 없어서 그런 구조로 지어진 듯했다.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뒤쪽, 격자무늬로 짜인 여닫이 나무문 너머로 네 명의 수도자들이 보였다.
일반 신자의 시선으로 제대 뒤편 좌측 벽면으로 붙인 의자에 나란히 앉은 수도자들의 옆모습을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봉쇄 구역 내의 수녀님 넷, 우리 포함 일반 신자 넷, 입회 지원자 그리고 신부님까지 총 열 명이 미사를 봉헌했다.
십자가의 길 14처 아래 벽을 가로지르는 기다랗고 좁은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맑고 투명한 수녀님들의 기도 소리, 느리고 풍성한 오르간 소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매주 같은 전례의 미사가 유난히 포근하게 마음에 내려앉은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자 원장 수녀님이 신부님과 우리 부부를 봉쇄된 ‘최후 방어선’ 구역으로 안내했다. 칸막이 뒤로 세 명의 수녀님들이 크게 웃으며 우리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하얀 웃음을 마주하니 절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어쩐지 작은 마음이 되어 낮아졌다.
“수녀님, 우리나라 음식은 입에 좀 맞으세요?”
신부님이 이런저런 안부인사 끝에 물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수녀님이 웃으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신부님. 저희 모두 노력해서 한국 음식 이제 잘 먹어요. 그런데 가끔 콜롬비아 간식 먹고 싶을 때 있어요. 사탕이나 젤리 같은 거 아주 가끔 생각나요.”
그녀의 말이 노랫소리가 같았다. 모국에서 쓰는 언어의 억양을 멜로디로 쓰고 우리나라말로 가사를 붙인 봄노래 같았다. 포근하고 다정한 말소리였다.
“기도 부탁할 거 있으면 부탁드려. 하느님이 여기 수녀님들 기도는 특별히 들어주실걸?”
신부님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등을 돌려 먼저 나갔다.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나조차도 절대자에게 기도한 적이 없는, 누구에게도 꺼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나는 아기가 없어서 슬픈 적이 없었다. 없다고 스스로 믿었고 아기 소식을 묻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을 하곤 했다.
없어도 상관없다, 지금 이대로도 좋다고.
“결혼한 지 3년이 넘는데 아기가 없어요, 수녀님.”
도레미 순처럼, 낮은 단차의 계단처럼 서있던 세 명의 수녀님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왜 눈물이 떨어졌을까. 아래로 아래로 방울진 눈물이 떨어져 내 손을 감싼 작은 수녀님의 손등 위로 흘러내렸다: 남편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거대한 파도 같은 감정이 나를 쓸고 밀어냈다.
“이리 오세요. 자매님. 얼마나 그동안 힘드셨어요. 저희가 기도해 드릴게요. 이리 가까이 오세요.”
수녀님들의 6개의 작은 손들이 내 배로, 등으로, 어깨로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 깊은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밤새 기다린 아침해 같은 기운이 몸 안으로 전해졌다. 나는 거기서 어떤 커다란 응답이나 믿음이 아니라 위안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도의 힘을 느꼈다.
“그분 계획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
수도원을 나오면서, 기도를 받았으니 곧 아기가 생길 거라는 희망보다는 그간 나도 모르는 새 엉킨 것들을 단정하게 풀어 수도원에 놓고 니온 것 같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비워진 기분이었다.
우린 그로부터 3년 뒤,
결혼한 지 6년 만에 아기를 가졌다.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콜롬비아에서 온 수녀님들에게 마음속으로 다정한 안부를 건넸다.
잘 지내시나요?
콜롬비아 젤리는 가끔 드시나요?
저는 간절히 빕니다.
수녀님들의 평화를, 자유와 기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