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5장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욕심이 고통의 근원이다. 타인과 비교해서 내게 없는 것이 보일 때 불만족스러워진다. 이 불만족감은 결핍감으로 이어지고 사람을 괴롭게 한다. 반면, 주어진 것에 주목하면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돈, 명예, 권력을 얻고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다. 모든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지 모르겠다. 예루살렘 광장을 샅샅이 보아도 바르게 일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판을 면치 못했다. 욕심이 사람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과 단절시키고, 삶을 지옥으로 이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는 의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본다.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다.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다. 이 욕심, 갈망하는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금욕주의나 무소유적 사상이 아니다. 세상 부귀영화를 욕망하면 우상숭배가 되지만, 하나님을 욕망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된다. 기독교는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하나님의 가치 아래 재배열 되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을 욕망한 사람의 상태이다. 하나님을 욕망한다는 것이 다소 모호한 종교적인 표현이라면, 정의, 공의, 소외된 이들을 헤아림이라는 세속적 언어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겠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공정한 판결이라고 말씀하신다.
메슬로우의 피라미드가 사탄적이라는 것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욕구의 최상위 단계가 자아실현이라는 의미로 종종 인용을 했지만, 생각해보니 사탄적이라는 것에 동의가 된다. 자아실현은 소명 안에서 이루져야 한다. 소명은 육체적, 정신적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나, 메슬로우의 욕구에서는 육체적, 정신적 만족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자아실현을 욕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속임인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해보라는 말, 엎드려 절하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말을 단칼에 거절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육체적, 정신적 결핍에 불구하고 욕망하게 되는 것이었다.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라고 표현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다른 욕망을 모두 정리해서라도 얻고자 한다. 결국 욕망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본성이다. 욕망은 절대선 앞에서 재배열되어야 하는 가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