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국
어린 시절 커다란 냄비 가득 곰국을 끓이는 모습은 우리 집 흔한 풍경이었다.
사골, 양지, 사태, 도가니, 소꼬리 등 그 재료와 상관없이 한솥 가득 끊고 있는 그 냄비는 곰국이었다.
나무 위키 : 곰탕
소의 고기와 내장 등을 넣어 끓인 국. 곰국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곰"이란 뼈나 고기 등을 "고았다"는 뜻으로, 결코 곰고기로 만든 국이 아니다.
정의가 이러하니, 특정 부위가 아닌 소고기나 뼈를 넣고 끓인 모든 것을 곰국이라고 불렀던 엄마의 명칭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분 없이 곰국으로 통칭되는 엄마의 음식만을 먹다가, 성인이 되어 처음 '설렁탕'을 접한 나는 곰국과의 접점을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나에게 곰국과 설렁탕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뿌연 하얀색의 국물에 소면이 들어간 밍밍한 설렁탕은 나에게는 정말 생소했다.
엄마의 곰국은 맑으면서도 뽀얀 색으로 진하고 구수하지만 뒷맛은 깔끔하고 시원했다.
TV만 틀면 맛집이 나오고,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별별 음식에 대한 설명과 분석을 해주는 시절이 되고서야 설렁탕이 사골 베이스의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밍밍한 설렁탕은 내 돈 주고는 사 먹고 싶지 않은 음식 중 하나였다.
나이를 한 두 살 먹어가며 곰탕, 설렁탕, 도가니탕 등을 먹을 일이 더러 있었지만, 아무리 맛있다는 맛집을 가도 기억 속 엄마의 곰국과는 달랐으며, 맛있다며 감탄을 자아낼 만한 곳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소고기찌개 맛집으로 유명한 모슬포의 한 식당에서 곰탕을 먹게 되었는데, 바로 내가 찾던 엄마의 곰국과 가장 유사한 맛이었다. 맑으면서도 뽀얗고 진한 맛!
오랜만에 곰탕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엄마의 '사골 곰국'은 핏물을 빼는 것으로 시작했다.
베란다 큰 대야에 사골뼈가 씻겨져 들어가고 물이 담긴다.
큰 솥에 한번 끓고 난 뒤 다시 씻어낸 후 본격적으로 끓이기 시작한다.
도시가스가 없던 시절, 곰국을 끓이다 LPG가스가 떨어져, 가스회사에 전화를 하던 일은 흔하게 벌어졌다.
한 번은 여행을 가시면서 곰국을 끓여 놓고 가셨는데, 엄마는 하루에 한 번 꼭 끓여 놓으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어린 우리들은 귀찮다며 밥도 챙겨 먹지 않고, 당연히 곰국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오신 엄마는 귀한 곰국이 쉬었다며 안타까워하셨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도 그 귀한 곰국이 쉬어버렸다면 정말 화가 났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그때의 엄마를 이해해 간다.
엄마는 '도가니 곰국'도 가끔 끓이셨는데, 꼭 살코기 한 덩어리를 같이 삶으셨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고기를 썰 때면 엄마 옆에서 부드러운 살코기를 받아먹는 걸 좋아했는데, 그때 엄마가 입에 넣어주는 고기 한 점은 너무나 맛있었다. 저녁식사 시간, 곰국을 떠 주시면 물컹물컹한 부위는 모두 아빠의 국그릇에 덜어 드리고 맛있는 고기만 골라 먹었던 것 같다.
이것도 편식이라면 편식이지만, 물렁뼈를 아빠에게 덜어주고 혼난 적은 없었다.
도가니탕이 먹고 싶다는 신랑의 말에 마트에서 소고기 스지와 우족을 사 와 곰국을 끓여 주었다.
신랑은 맛있게 먹으면서도 도가니탕 타령이다.
다음에는 라벨에 꼭 '도가니'라고 적힌 것을 사다가 진정한 '도가니탕'을 끓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