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장비빨과 함께

by 라라앤글


누군가의 메일을 이리도 애타게 기다렸던 적이 있던가. 야호! 나도 드디어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었다. 드디어 나의 프로필 앞에 당당하게 <브런치작가>라는 이름표를 달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스토리가 뭔지, 브런치작가가 뭔지도 모르고 도전한 글쓰기였지만 합격은 누가 뭐래도 기쁜 일이다.

작가가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아, 뭘 쓰지? 무슨 이야기부터 써야 할까? 기다리는이 아무도 없지만 한번 써 보자. 나를 위해 써 보자. 자, 준비하시고 쓰세요!


다다다다다다. 부지런히 엄지권법을 날려본다. 이놈의 엄지는 왜 이렇게 두툼한지. 화면이 커서 보기 편하다고 구매한 갤럭시 노트20 자판은 왜 이렇게 작은 것인지. 계속 오타가 난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쓰는 글과 지우는 글의 양이 비슷하다.

꽤 빠른 엄지권법을 자랑했는데, 글쓰기는 카톡 대화방 타자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물레에서 실이 풀어지듯 생각은 줄줄 빠져나오는데 엄지가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다. 오타난 글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틈에 멋진 문장이 이미 저만치 날아갔다.

"제발 돌아와 줘. 정말 좋은 문장이었단 말이야. " 애타게 부르짖어도 돌아오질 않는다. 야속한 기억력.






아이들이 학습용으로 쓰다 방치된 오래된 갤럭시 탭이 어디 있을 텐데... 아 찾았다.

책장 저 위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잠자고 있는 갤럭시 탭의 전원을 켰다. 역시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밥을 줘야지. 전원을 꼽아 탭의 배도 두둑하게 채워준다. 자 그럼 쇼핑몰 할 때 유용하게 사용했던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하자. 오래간만에 하는 스마트 놀이는 역시나 어렵다. 별거 아닌데 땀이 삐질 난다. 급변하는 스마트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 내야 한다.

연결 성공!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브런치스토리에 나의 이야기를 써 볼까?

아뿔싸! 너무 오래된 탭이라 그런지 <브런치스토리> 앱을 깔 수 없다는 야속한 메시지가 나온다. 나 다시 엄지로 돌아가야 해?


<브런치스토리>가 깔리지 않는 야속한 탭





후아. 너무 힘들다. 글쓰기 프로젝트 과제를 해서 구글에 올리는 것도 어렵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도저히 엄지가 따라가지 못한다. PC에서는 어떻게 보이는 건지 스마트폰 세상에서는 알 수가 없다.

안 되겠다. 장비를 구매하자! 나도 똥머리에 무심한 듯 연필을 꽂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채로, 한쪽 무릎 올려 세워 심각하게 노트북을 두드리는 작가가 되어봐야겠다.


퇴근 후 야심 차게 삼성스마트스토어와 엘지베스트샵을 찾았다. 일십백천만, 십만, 백만... 전시되어 있는 노트북은 최하 100만 원 이상이다. 날 가져가라고 자태를 뽐내고 있는 녀석들은 200만원도 넘는다.

"제가 주로 글을 쓸 거라서 고사양은 필요가 없어요. 가격 착한 아이면 좋은데. 하하하"

나도 어색. 노트북 설명해 주는 그도 어색. 첫 소개팅의 남녀처럼 어색한 미소만 남긴 채 다음에 오겠노라 인사를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가의 매장이여 안녕. 성공해서 돌아올게.


믿을 건 쿠팡뿐이다. 검색창에 <가성비 노트북>을 검색해 본다. 저장공간, 메모리칩, 쿼드코어 CPU... 문과언니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그럴 때 정답은 단 하나! 리뷰 많은 순 정렬.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꼼꼼하게 리뷰를 읽어본다.

"어? 이 노트북은 왜 이렇게 싸지?"

매장에서 200만 원 가까운 노트북을 보다 쿠팡 세상에서 꽤 저렴한 노트북을 발견하니 반갑기가 그지없다. 아하 리퍼제품이구나. 중고라는 말이네. 남의 손 탄 중고인데 쓸만할까?

쿠팡에는 꽤 많은 리퍼제품의 노트북이 검색됐다. 원래 중고는 잘 구매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리퍼노트북이 나를 끌어당긴다.

에라 모르겠다. 반품 가능하다고 하니 얼마나 사용감 있는 중고가 오는지 한번 받아보자. 수많은 리퍼노트북 중에서도 엘지베스트샵에서 내 눈을 끌어당겼던 LG gram 14인치 노트북을 픽했다.


중고면 뭐 어때



두근두근두근. 쿠팡 답게 배송은 로켓을 타고 날아왔다. 생활흠집정도만 있는 하얗고 괜찮은 녀석이 도착했다. 오직 충전기만이 나는 중고제품이요 하고 티를 내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살펴 보는데 꽤 맘에 든다. 그래, 그램아 앞으로 나의 글쓰기를 너에게 맡긴다. 잘 부탁해.

정품충전기, 노트북 파우치, 키보드스킨을 추가구매한다. 역시 돈 쓰는 게 제일 재밌네. 더 큰 재미를 위해 열심히 일 해 보자.






<브런치스토리>를 검색해서 작가의 서랍에 얌전히 자고 있는 나의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본다. 어색하던 노트북 키보드도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보니 금세 익숙해진다. 그 옛날 한메타자 베네치아 800타의 실력발휘를 여과 없이 뽐내본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니. 왜 이제야 나에게 온 거야.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던가. 나의 gram은 내 타자소리를 듣고 더 이뻐지는 듯했다.

더 이상의 엄지권법은 없다. 나의 글은 흰둥이 gram과 함께 날개를 달 것이다. 떠오르는 글줄기를 놓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찰나의 날아갈 문장과 단어를 노트북 위에서 붙잡아 본다.


육아도 장비빨, 요리도 장비빨, 글쓰기도 장비빨.

역시 장비빨의 힘이 필요하다. 비록 중고 노트북 일지라도 나의 글쓰기에 날개를 달아줄 이 하얀 아이를 오래도록 이뻐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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