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부름이 우렁차다. 그녀가 날 부르면 밥을 먹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달려가야 한다. 그녀가혼자 뒤처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7년째 이어오는 중요한 과업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그러니까 유치원 최고 존엄 7세인 그녀는 초등학교 막내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유치원 교실에서는 자리에 조금 더 오래 앉아 있는 연습, 받아쓰기 연습등 차근차근 입학준비를 하고 있다. 그중의 하이라이트는 바로바로 스스로 똥꼬 닦기 훈련!
초등학교는 애기가 아닌 어린이가 다니는 교육기관이다. 애기라고 하면 싫어하는 "나도 이제 언니야" 외치는 그녀들이 가는 곳이 바로 초등학교다.
어린이들이 생활하는 그 화장실에는 선생님을 호출할 벨이 없다. 오롯이 아이 혼자 뒤처리를 하고 나와야 한다. 그러기에 7세 반에서 똥꼬 닦기 훈련은 입학 준비 중의 최고봉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내 꽁꼬는 내가 닦는다>
표어 같은 결심을 품고 보이지 않는 그곳과 마주 해야 하는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7세 형님들은 하반기부터 스스로 똥꼬 닦기 훈련에 돌입한다. 휴지를 몇 칸 뜯어야 하는지, 몇 번을 접어야 하는지 잘 배워서 이제 스스로를 시험해야 한다. 벨을 누르면 달려오시던 선생님을 이제 놓아 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내 새끼 똥꼬 닦아주는 것도 큰 일인데 수많은 아이들의 똥꼬와 마주했을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들은 얼마나 고되셨을까. 선생님들께 경의를 표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엄마, 이제 내가 똥꼬 닦아 볼게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2022년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갑자기 훅 들어온 그녀의 고백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기분이 좋기도 하다. 더 이상 밥 먹다가 불려 가는 일은 없는 것인가?
"정말 잘할 수 있겠어? 엄마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
그녀의 표정이 비장하다. 휴지를 몇 칸 뜯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접어야 하는지 이미 유치원에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오른손에 사뿐히 올린 휴지를 과감하게 뒤로 돌려 똥꼬를 닦는다. 불안하지만 칭찬을 마지않았다. 내 새끼 다 컸구나. 얼씨구나 드디어 똥꼬 닦기와 작별이다.
그날 밤 잠든 아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손안에 쏙 들어오던 고사리 같던 작고 보드라운 손이 언제 이렇게 커졌는지 모르겠다. 언제 다 크나 싶다가도 이런 자그마한 변화에 아이의 성장이 갑자게 크게 느껴진다. 컸구나. 똥꼬 닦는 일 하나와 작별했을 뿐인데 아이가 다 큰 거 같다. 이렇게 엄마 손 가는 일이 또 하나 줄어들었다. 조금씩 성장하는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금방 사춘기가 오고 나에게서 멀어질 것 같아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품 안에서 꼬물 거리며 엄마 젖을 빨다 단유를 할 때도 아쉬웠고, 복숭아 같이 희고 보드라운 엉덩이에 푸르르르 입방구를 할 수 없어서 기저귀 뗄 떼마저도 아쉬웠다. 언제 커서 엄마손 좀 덜 탈래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하나님께 너무 크게 들렸나 보다. 아이가 또 이렇게 한 뼘 성장했다.
"엄마, 똥꼬 닦아 주세요"
8세 언니가 된 지금도 그녀는 가끔 나를 부른다. 우리 집에는 비데가 없다. 샤워기와 엄마손이 그녀의 최고 비데이다. 아무래도 건조한 휴지보다는 엄마의 손길이 닿은 물줄기가 개운한가 보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또 부른다.
"그만 좀 불러"
그녀를 살짝 흘겨보았지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왜일까.
"왜요, 여긴 집이잖아요. 학교에서는 혼자 잘한다고요. 나 애기라면서요. 애기니까 닦아주셔야죠"
우리 애기, 우리 애기 하고 부를 때는 이제 애기 아니고 언니라고 뾰로통하더니 이럴 때는 자발적으로 애기가 되는 그녀다.
그녀의 똥꼬와 불완전한 작별인가? 사실 똥꼬와의 작별이 조금 더 늦어진다 해도 별로 아쉽지가 않을 거 같다. 아직은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거 같아서 종종 나를 불러주는 그녀가 귀엽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