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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체로 보면 고작 일 년일 뿐

<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by 웅숭깊은 라쌤


다시


부. 1.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


2.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3.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하여.




아픈 시간도, 돌아보면 추억이다. 아니, 추억이라 한정 짓기엔 고통은 삶에 있어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없어선 안 될 필수품이랄까? 그러한 경험이 내 의지와 욕망, 기운을 북돋는 기폭제가 되어 주니까. 문득 생각한다. 인생이란, 고통 속에서 온전한 나를 채워가는 기나긴 여정일 거라는.

난 재수생이었다. 친구들이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행복에 겨운 3월을 맞이했을 때 나와 몇몇 친구들은 충정로역 근처에 있는 재수 종합학원 수강생의 삶을 이미 살아내고 있었다. 학원은 정말 학원답지 않았다. 마치 고등학교처럼 복장 규정, 두발 규정, 무단 외출 금지 등 학생들이 공부 외에 다른 것에 빠지지 않도록 철저히 제한하고 있었다. 그래서 덕분에, 공부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덕분에, 내가 얼마나 허투루 공부했었는지 확실히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수능 과목에서 나의 최대 취약점은 영어. 대체 고교 3년 동안 무슨 공부를 한 것인지 EBS 교재 속 영어 문장들은 전혀 해석되지 않았고, 학원 선생님과 상담 끝에 중학교 독해 문제집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나의 수준이 어디에 도달한 상태인지 명확히 알 수 있던, 그야말로 소중한 경험. 이후 어떤 업무, 상황에 맞닥뜨리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단단한 상태로 차근차근 쌓아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9월 즈음 전국 고등학교 고3 교무실은 수시 상담으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한다. 교사 한 명당 수십 명을 상대하면서도 모든 담임은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학생의 미래를 고민한다.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 생활기록부 내용을 기반으로 최선의 결과가 될 수 있는 대학을 선별하여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나누지만!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녀석들이 참 많다. 여러 사례가 있긴 하지만 고집쟁이들의 논거 중 대표적인 것은 논술. 논술 전형은 대역전의 기회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도박이다. 그래, 내신 4, 5등급인 학생들이 딱 논술 실력만으로 서울 주요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들이 있지, 있지만! 논술 전형의 경쟁력은 상상을 초월하는걸? 몇몇 대학의 논술 전형 경쟁률을 살펴보면 100대1은 아주 쉽게 훌쩍 넘어간다. 말이 100대1이지 심지어 6명을 선발하는 학과에 996명이 지원한 예도 있다. 정확히 166대1. 이걸, 뚫겠다고? 정말 어쩌다 운 좋게 합격하여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도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당연하다는 듯 눈물을 쏟고 만다.


소위 ‘6논술’, 그러니까 수시 모집에서 모든 대학을 논술 전형으로 지원했던 윤논술양은 역시나, ‘6광탈’이라는 초라한 결과를 맞이했고 수능 성적도 딱히 만족스럽지 못해 결국 재수를 선택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윤논술양은 좌절 그 자체였다. 재수라니, 다른 친구들은 합격증을 받아들고 찬란한 20대를 꿈꾸고 있는데 재수, 재수라니! 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논술양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다시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보면 둘도 없는 기회야.”

“왜요?”

“나를, 돌아볼 수 있거든.”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고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다. 사실 재수를 한다고 드라마틱한 성적 상승이 이뤄진다는 보장도 없고 이제 대학 간판보단 개인의 능력과 역량이 더 중요한 세상이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고작 일 년일 뿐이고, 재수의 목적은 결국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지 않은가. 다만, 잠시 돌아서 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깨우쳐야 한다. 마치 길을 떠날 때 가장 빠른 길 대신 경치 좋은 곳으로 살짝 둘러 가는 코스를 선택하듯, 무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을 위한답시고 입시 비리를 서슴지 않는 정치인은 어른이 아니다. 자식을 위한답시고 부정 채용 청탁을 하는 공직자는 결코, 어른이 아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땅의 수많은 논술양, 논술군에게 과감히 외쳐야 한다. 편한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가라고, 유치환 시인의 말처럼 열렬한 고독 가운데에서 운명처럼 ‘나’와 대면함으로써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그러니 용기 내어 아라비아의 사막 한가운데 뛰어들라고, 우린 끊임없이 외쳐 주어야 한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린 넘어질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일찌감치 많이 넘어져 보며 그때마다 잘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깨우치길, 그렇게 이끌어주는 어른들이 많아지길, 그리고 그 어른 중 하나가 나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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