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보통
명.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음.
나의 첫 투표는 2008년, 군대에서 갓 상병을 달았을 때였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였고 그날의 떨림을 잊을 수 없다.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었고 한껏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물론, 선거 당일은 부대원 모두 휴식이 부여되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내 인생 최고의 투표는 이후 몇 년이 지난 2014년이었다.
‘선택 2014’를 기억하는가? 대선? 지방선거? 아니다.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10여 년 전 우리를 웃기고 울리던 대표 예능 방송 <무한도전>의 프로젝트 중 하나, ‘선거 특집’의 제목이었다. 정말 재밌는 특집이 많았음에도 유독 이 선거 특집이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이유는 뭘까? 노홍철의 ‘다 보여드립니다’란 콘셉트도 참신했고 믿고 보는 유재석의 명연설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형돈의 ‘보통 사람’이란 캐치프레이즈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방송 중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사회의 절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며,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들으며 울컥하기까지 했던 그의 연설문 덕에 이 땅의 보통 사람들은 큰 용기와 희망을 얻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대부분은 보통 사람이고, 나도 그러하니까.
학기 중엔 얼굴 보기 힘들었던 오장금군이 졸업식 날엔 까먹지 않고 등교하여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께 인사를 했다. 걸핏하면 결석하는 문제아 학생이었던 건 아니다. 요리 전문학교에 위탁 교육을 받으러 가느라 우리 학교 수업은 듣지 못했던 것.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탁 교육은 ‘공부에 가망성이 없는 아이들’이 주로 선택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장금군은 그런 정도의 학생은 아니었기에 처음에 요리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결론적으로, 정말 잘한 일이었다.
“쌤, 저 자격증이 세 개에요.”
대, 대단했다. 한식에 일식, 양식까지. 일 년 내내 손가락이 베이고, 피 흘리며, 온갖 고통을 참아가며 미친 듯이 임했다고 했다. 덕분에 그저 좋아하기만 했던 요리에 정말 재능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기특함에 칭찬을 늘어놓으려던 찰나,
“아, 저 취직도 했고, 이제 출근하면 월급도 한 삼백은 받아요!”
어라? 사, 삼백? 솔직하게, 이 구절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억울함’이었다. 나 학창 시절 더럽게 공부 열심히 했고 재수까지 했던 데다가 직장 구할 때도 30대1 경쟁률을 뚫고 말이야, 하여간에 내 청춘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겨우겨우 첫 월급 190만 원을 벌었는데! 고작 스무 살짜리 녀석이 10년 차가 넘은 내 현재 월급보다 더 벌어들인다니, 억울하지 않겠냐고요! 물론, 30초 정도 지난 뒤에 ―정말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고 마음이 금방 바뀌었다.
“그걸로 만족하지 마, 난 네가 더 벌었으면 좋겠어. 물론, 나도 더 벌 거야.”
내가 못 번다고 남이 덜 벌길 바라는 건 정말 멍청한 생각이다. 나도, 오장금군도 잘 벌어야지. 잘 버는 이들만 잘 버는 그런 세상 말고, 모두가 풍족하고 여유롭게 사는 세상이 바로 형돈이 행님이 말씀하신 그런 세상 아니겠습니까! 형돈이 형, 형 돈 좀 저 주세…….
물론 돈으로 모든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 모든 이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러니까 결국 하고픈 말은,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특별한 소수의 집단이 모든 걸 누리는 불공평한 사회가 아니라,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도 잘 먹고 잘사는, 마냥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곳에 살고 싶다.
그런데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존재라면 아마 보통 사람은 아닐 거다. 아니, 보통 사람의 위치에선 그걸 시도하기조차 힘들겠지.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이냐고?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과감히 가진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아차, 애석하게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정형돈은 선거에서 패배했고 보통 사람은 승리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보통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이냐고? 다만, 교육을 통해 우린 우리 아이들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 수 있다는 말!
개천에서 용 나도록 돈 많이 버는 방법을 알려주자는 게 아니다. 모든 직업엔 귀천이 없음을, 세상 누구나 존중받아야 함을, 부와 명예보단 희생과 나눔이 더 큰 가치임을, 그리고 개인의 욕심보단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함을, 알려주자는 거다. 그렇게 교육의 순기능이 작용하며 쭉 이어진다면, 언젠간 우리 모두가 행복한 아름다운 세상이 올 수도 있다.
명문대에 진학한 오장금군의 또래 친구 중에는 ‘고작 요리사’라며 그를 깎아내리는 이도 존재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찬란하리라 장담한다. 10대 때부터 자기 꿈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들은 흔치 않으니까. 이미 그는, 아주아주 특별한 보통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