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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가(1)

청소년을 위한 골 때리는 인문학

by 웅숭깊은 라쌤

소년의 시간, 202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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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에는 가해자인 피해자도 있다


여성가족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8년 이후 14~18세 범죄 피의자는 매년 60,000명 이상입니다. 그중 절반은 강력 범죄자이며 또 그중에는 흉악범으로 분류되는 이들도 있죠. 사실 2017년까지는 10세~18세로 조사 대상의 범위가 더 넓었는데, 청소년 범죄자가 100,000명 이상인 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 범죄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학교에서도 종종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할 때가 있죠? 그런데 그러한 사안 중에는 정말 별것 아닌 데서 시작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괜한 말장난으로 시작했던 것이 다툼이 되고, 주먹다짐이 되고, 심지어는 SNS에서 서로를 저격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지죠. 이러한 경우엔 피해자와 가해자는 명확히 구분하기 힘듭니다. 아니, 누가 더 나빴는지를 굳이 따져볼 필요가 없달까요? 앗, 이 챕터를 읽으며 절대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제가 살인이나 폭력과 같은 범죄의 정당성을 말하려는 게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하고 싶은 핵심은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란 것이죠. 일방적인 괴롭힘이나 폭력도 있지만, 쌍방 과실인 경우도 정말 많거든요.

2025년 최고의 문제작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의 시간>은 우리에게 강렬하고도 따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마치 ‘당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가’하고 묻는 듯한, 신의 심판과도 같은 작품이었달까요. 14세, 데뷔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오언 쿠퍼’가 연기한 ‘제이미’의 예측할 수 없는 심리 변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모두의 노력, 가해자가 왜 가해자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대목, 더불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가족이 겪는 쓰라린 고통까지 모조리 쏟아내며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작품, <소년의 시간>.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하죠!



혐오는 반드시 범죄를 낳는다


<소년의 시간> 속 제이미의 범죄는 ‘인셀’이라는 혐오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다소 낯설 수 있는 단어, ‘인셀’은 ‘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로 우리말로 하면 ‘비자발적 독신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연애나 결혼을 하고는 싶지만 상대가 없어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1990년대 후반, 한 캐나다 여성이 블로그에 글을 올립니다. 이 여성은 연애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했죠. 처음엔 주로 신세 한탄하는 글들이 올라왔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개념이 변질되고 여성 혐오와 같은 메시지로 도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인셀 커뮤니티는 하나의 ‘혐오 단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온라인에만 머물던 인셀이란 표현이 현실 세계에서 급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2014년 엘리엇 로저가 일으킨 아일라비스타 총기 난사 사건입니다.

스스로를 인셀이라 지칭하던 대학생 엘리엇 로저는 어느 날 살인 예고 영상을 온라인상에 업로드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여성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내용이었죠. 실제로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에서 총기 등으로 6명을 살해하고 14명에 상해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죠. 마치 그를 숭배하듯 유사 범죄도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제 인셀은 혐오 단체를 넘어 ‘테러 위협 단체’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인셀 문화는 우리 사회에도 전파되어 수많은 청소년들의 잘못된 성 인식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SNS상에서 특정 의미가 담긴 이모티콘을 사용하여 그들만이 아는 메시지로 상대를 희롱하거나, 익명성을 활용해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표현을 일삼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죠.


참, 이 글은 혐오 문제가 특정 성별만의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가려는 건 아닙니다. <소년의 시간>이란 시리즈에서도 여성 청소년 역시 이런 잘못된 문화의 가해 행위에 동조하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고요. 물론 범죄를 옹호하거나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갈등보단 협력, 화해, 배려와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무엇으로 대하고 있는가


매년 새 학기가 다가오면 많은 친구들이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안게 됩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우리 반엔 어떤 친구들이 모일까?’와 같은 궁금증이 우릴 설레게도, 불안하게도 만드니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늘 100% 완벽하게 만족하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친한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대신 낯설고 어색한 이들과 어울려야 하는 어려움이 누구에게나 찾아오죠. 이처럼, 세상의 모든 관계는 우리가 계획하거나 의도하여 완성될 순 없습니다. 낯선 친구를 만나게 되듯 생각지도 못한 순간 문득 다가오는 것이 관계이고, 친한 친구와 다른 반에 배정받아 헤어지는 것처럼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대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0년대,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히브리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통해 아랍 세계와 유대인의 상호이해를 위해 노력했던 ‘마르틴 부버’. 그는 자신의 저서 <나와 너>를 통해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만남 철학’을 제시합니다.

마르틴 부버에 의하면, 세상에는 ‘나와 너’의 관계가 있고 또 ‘나와 그것’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나와 너’라는 건 상대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본다는 것이고 ‘나와 그것’은 타인을 소유와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인간과 인간은 반드시 ‘나와 너’의 관계가 되어야 하지만, 다수의 존재들이 상대를 대함에 있어 ‘나와 그것’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인류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말도 덧붙이죠. 타인은 나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나와 같은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면서 오직 필요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판단해 버린다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필요성이 떨어지면, 우린 너무도 쉽게 그 관계를 포기해 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마르틴 부버.jpg 마르틴 부버

참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린 그게 누구이든 ‘나와 너’의 관계가 완성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를 ‘그것’으로 대함으로써 필요성에 의해 존재 가치를 판단하게 되면 결국 그들도 나를 똑같이 대하게 될 테니까요. 다 떠나서, 평소에 우리가 아주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악마들과 다를 게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겁니다. 앞서 언급했던 ‘인셀’ 역시 상대를 고작 ‘성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했기에 사회적 문제로 이어졌던 것이었죠? 조금 더 나아가 보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 뉘른베르크에서는 유대인 수감자를 대상으로 의료 실험을 자행했던 나치 의사들에 대한 전범재판이 열렸고, 그때 검사 측은 공소사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살인범들은 가련한 피해자들을 개별 인간으로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해자들을 한 무리로 엮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했습니다.”


인간을 도구화하여 잔혹하게 살해했던 악마들. 적어도 우린 그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자, 이제 돌이켜 나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내 주변에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존재를 떠올립시다.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여부로 그들을 판단하진 않았나요?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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