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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1)

청소년을 위한 골 때리는 인문학

by 웅숭깊은 라쌤

벼랑 끝에 서서, 2025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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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정말 죄가 아닐까?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니라면서 가난은 정말 죄가 아닌지 묻고 있다니! 정말 역설적이네요. 그런데 정말이지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그렇게 떠들어봤자 큰 의미는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야 그저 말뿐인 말인 셈이죠. 그들에게 이러한 논쟁 자체가 사치일지 모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벼랑 끝에 서서>는 가난을 마치 죄로 여기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해 가난의 당사자가 벼랑 끝까지 몰리는, 그리하여 결국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행위를 선택하게 되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주인공 ‘지나이어’는 흑인 여성이자 8살 딸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는 싱글맘입니다. 동시에 아이의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여 쫓겨날 위기에 처한, 푼 돈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참으로 미약한 존재이기도 하죠. 작품의 원제는 ‘Straw’인데, 이 단어엔 ‘지푸라기’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물을 나타내기에 정말이지 완벽한 단어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보장 정보시스템 통계 자료에 의하면, 2025년 기준 우리나라 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자의 수가 무려 260만 명에 이릅니다. 나와는 먼 얘기라며 관심갖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이건 아무리 먼 얘기라도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이기 때문이죠. 참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하여, 가난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가난이란 무엇인가?


‘가난’은 공식적인 문서에선 ―물론 세부적인 의미의 차이는 존재하지만―주로 ‘빈곤’이라 표현합니다. 여기선 두 표현이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소득이 낮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보편적으로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구분하고 있죠. 절대적 빈곤은 소득이 최저 생계비보다 낮아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조차 어려운 상태를 말하고, 상대적 빈곤은 전체 인구 대비 소득 수준에 따라 결정됩니다.

절대적 빈곤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방식으론 ‘라운트리방식’과 ‘라이덴방식’이 있습니다. 라운트리방식은 최저한의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소득 수준이 얼마인지를 판단하는 것이고, 라이덴방식은 사람들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빈곤의 기준을 정하는 방식이죠.

상대적 빈곤은 말 그대로 상대적 기준에 따라 빈곤을 측정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국가의 인구가 100명이라고 가정하고 그들을 소득순으로 1등부터 100등까지 쭉 나열하는 거죠. 거기서 딱 중간에 해당하는 사람의 소득을 ‘중위 소득’이라 부르거든요? 그 중위 소득이 100만 원이다, 그런데 그 100만 원의 50%를 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절대적 그리고 상대적 빈곤율은 해마다 10% 중반에서 후반대 사이로 측정된다고 하네요.

그런데 말이죠, 이러한 연구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는 걸까요? 이 사회가 가난한 이와 가난하지 않은 이를 잘 구분하고 있다면, 이미 이 세계에서 가난은 사라졌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전 세계에 다양한 복지정책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요?


사회 현상 전문가들의 가난에 대한 논의는 꽤 오랜 기간 이어져 왔습니다만, 풍요가 가득한 이 시절에도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이 상당하다면 그 접근방식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껏 논의의 주체였던 이들은 가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말이죠. 영국 노동당 상원의원을 지내고 영국 러프버러 대학교 교수로 활동한 ‘루스 리스터’는 자신의 저서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빈곤의 전문가는 빈민이므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빈곤 당사자들의 견해가 반영되어야 한다’라고 말이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은 정책은 실질적인 효력이 발생하기 어렵다는 것, 그건 어쩌면 상식 중의 상식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식이 발현되지 못하니 문제는 끝까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고요.

루스 리스터.jpg 루스 리스터


더불어 루스 리스터는 빈곤에도 다양한 범주가 존재함을 언급합니다. 성별, 인종, 장애, 연령, 지리 등 여러 요인이 빈곤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단 말이죠. 예를 들어 노년기에는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므로 수입원은 줄고, 반면 의료비 부담은 높아지겠죠? 가장 많은 돈이 필요한 시기에 가장 적은 수입으로 생활하다 보면 자연히 빈곤층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빈곤에 대해 함부로 정의를 내려선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정책적 접근에는 가치 판단이 수반되므로 정의가 내려진 순간 그 테두리에서 벗어난 ―하지만 벗어나선 안 되는―이들이 발생할 것이고, 받아야 할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왜 우린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하는가?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 궁금하시죠? 우리가 가난한 이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당최 무슨 말이냐고요? 반대로 생각해 보죠. 가난한 이들을 돕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들이 게을러서? 멍청해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데에는 가진 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아마 이 정도는 다들 아시겠지만, 카카오와 커피를 생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터무니없는 임금을 받고 생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시는 커피 값의 대부분은 그들이 아닌, 이미 충분히 잘살고 있는 이들에게 돌아가죠. 그러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것이고요. 아니, 돈을 버는 이들이 똑똑하고 영리한 거 아니냐, 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건 똑똑한 게 아니라 나쁜 겁니다. 영리한 게 아니라 비겁한 것이고요. 무조건 기업가가 덜 벌어 가고 노동자가 훨씬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기업가도 그러한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하고 투자를 이어왔을 테니까요. 더불어 자신의 ‘쓸모’를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여 정쟁과 갈등만 일삼는 이들을 두둔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부분에 대해선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가난을 방치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앞서 언급했던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나 할까요?

2025년 4월, 브라질의 한 커피농장의 일꾼 8명은 국제권리변호사회의 도움을 받아 ‘스타벅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이들이 일한 농장은 스타벅스에 커피 원두를 공급하는 곳이며, 이들은 농장에서 사실상 노예 생활을 하다 브라질 당국에 의해 구출된 브라질인들이었죠. 그곳에선 아동노동 착취가 있었고, 노동자들은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사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새벽 5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20분을 제외하곤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스타벅스는 무관하다, 농장주의 책임이다, 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스타벅스 관련 노동 착취 문제는 수십 년째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책임이 없을까요?

다시 질문해 보죠. 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하냐고요? 굳이 다른 고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니까요. 인간이라면 응당 타인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 그래서 외면한다? 나쁘고, 또 비겁한 게 맞지 않나요?


아프리카 커피 농장.jpg 아프리카 커피농장 노동자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지만, 사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비단 도덕적 책임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익이란 측면에서 접근해 보아도 이는 꼭 필요한 행위라는 거죠. 맨체스터 대학교 개발학 교수이며, 현재 글로벌 개발 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데이비드 흄’의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가>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크게 어려운 접근은 아니더라고요. 세계 모든 나라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촘촘히 연결된 이 세상에서 경제적 측면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기 때문이죠. 정치․경제․사회․문화는 항상 서로 영향을 끼칩니다. 아무리 개발도상국이라 할지라도 나름으로 지하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이를 원활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강대국들은 적극적인 해외 원조를 통해 테러나 전염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루스 리스터의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에도 관련 있는 설명이 있더라고요. 빈민들이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사회적 행동’을 취하는데, 그들은 극단적 상황에 처하면 마약 거래와 같은 불법적 노동에 참여하거나 집단을 구성해 범죄조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누구에게나 범죄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개인 차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면 단순 범죄가 아니라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죠? 사회 문제로 인해 예기치 못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모두가 평화로운 세계를 조성하기 위하여, 우린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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