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by ratatouille

헬싱키 중앙역의 시계탑을 보며 맞는 새해는 자꾸만 과거의 부끄러움을 잊게 하고,

또는 그것 또한 사랑해 보라 부추깁니다.

여기도 삶이라는 것이 있기에

누군가는 부단히 트램을 타고 일을 나가고,

누군가는 저처럼 추위에 떠는 여행객들을 맞아줄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내립니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로 몸을 녹이고

이장욱 시인의 정오의 희망곡을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한국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이 이 시집밖에는 없더군요.

또래의 카페 직원이 새해 인사에 수줍게 웃어줍니다.

별것 아닌 새로운 시작에 조심스레 마음이 설레는 건

모두 같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1월 2일, Ateneum 뮤지엄에서 클림트 와 빈 분리파의 전시를 합니다.

새해에는 미술관 사람들도 쉬어야지요.

그림의 떡 보듯 내 것이 아닌 미술관이

가벼운 실연을 맛보게 하지만,

덕분에 다시 떠올린 클림트의 그림들은

새 시작으로 찬 마음을 데워 줍니다.

클림트는 과거 19세기 빈에서

가장 정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모범생 화가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극장과 공공 건물의 벽화를 그려냈지만, 이 성공은 오히려 그의 한계가 되었습니다.

그는 ‘잘 그렸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한편, 그가 빈 대학 천장화 논란으로

외설과 불경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으며

국가와 아카데미를 위한 예술과 작별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며

기존의 고전적 미술 규칙을 거부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화려한 장식과

내면의 욕망에 충실한 회화를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경영 수업에서 교수님께 들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성공적인 투자 의사 결정을 위해서는

매몰 비용을 포기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안전한 성공을 버릴 용기,

비난을 감수하는 단절.

때로는 그것들이 삶의 재탄생을 빚어냅니다.

클림트를 알아갈수록 그의 그림들은 용기를 줍니다.

제 안의 무언가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피워 내고자 하는 것은

더욱이 그렇습니다.

춥고 먼 타지에서

제 자신을 몰아세워 보려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가치를 증명해 보려는 존재들은

과거에도 살았고, 현재에도 살아 있습니다.

클림트와 그의 작품들처럼 말입니다.

클림트의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해 보고자 합니다.

무모한 용기가 삶을 좌절시킬지라도,

그것은 그리 길고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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