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어쩌면 영원히 작품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또한 우리 모두에게 유한합니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주체도, 소비하는 주체도 모두 불가피한 유한함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술은 오롯이 인간의 품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기에 예술을 사랑하는 전시 또한 인간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기한이 정해져 있기에 아쉽지만 소중하다는 점에서
때로는 우리를 절박하게 만들며
하나를 보내고 또 하나를 기다리는 겸허한 마음을 남깁니다.
빈센트 반 고흐 전, 에드바르 뭉크 전과 같이
한 거장의 작품으로 구성된 몰입형 전시들은
대개 작가의 삶의 궤적을 따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들의 삶과 함께 태어나고, 함께 저물어갑니다.
전시는 모두가 동경하는 저명한 예술가들 역시
하나의 삶을 살아낸 한 사람에 불과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전시를 통해 그들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합니다.
뭉크 전에서는 에드바르 뭉크의 마지막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슬아슬한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선과 색은 담백하고 다소 밝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어딘지 모를 불안한 심상이 스며 있습니다.
후기 자화상 중 가장 불안정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화상–밤의 방랑자〉는
자신의 종착지를 마주한 한 인간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인물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의 공허한 시선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돕니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혹은 작품 속의 노인도, 그를 그려낸 화가 자신조차
그 의중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서〉는 뭉크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는 늙은 뭉크 자신으로 추정되는 형상이 서 있습니다.
왼쪽의 시계는 인간의 손으로는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거침없이 흐르며,
그를 죽음의 순간으로 밀어 넣을 것만 같은 긴박함을 자아냅니다.
오른쪽의 침대는 곧 다가올 영원한 안식을 위해 준비된
무한한 숙면의 둥지처럼 보입니다.
따뜻하면서도 불안한 색채 속에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2006년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On Late Style)』를 출간하였습니다.
사이드는 ‘말년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의 말년이 지니는 다양한 양상을 탐구합니다.
그는 특히 말년 예술이 드러내는
비시의성, 부조화, 그리고 비타협적인 태도에 주목합니다.
예술가들은 삶의 종착지에 가까워질수록
성숙과 연륜, 지혜에 이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오히려 예술의 ‘성숙’을 포기한 채
보다 원초적이고, 사회와의 불편함을 유지한
‘화해되지 않은’ 예술을 남기기도 합니다.
사이드는 바로 이 적나라하고 솔직한 예술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말년의 예술들은
인간의 본질에 지나치게 가깝기에
불편함과 불안을 동반하지만,
그만큼 진실에 가까운 솔직한 아름다움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뭉크의 고향, 노르웨이에서
앞으로 마주하게 될 그의 작품들과 삶의 궤적을 고대하며
그의 말년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쇠약해진 육체와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들고
그는 끝내 자신의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는 사이드가 말한 말년성의 또 하나의 표본이 됩니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에 사무치게 괴로워하면서도
그 감각을 끝내 숨기지 않고 화면 위에 남깁니다.
그의 후기작은 ‘화해되지 않은 말년’이라는 상태에
유독 가까이 다가가 있다 느껴집니다.
뭉크는 한 사람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그 인물은 뭉크 자신일 수도 있고,
삶의 유한함을 깨달은 우리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도록 남을 그의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동시에
미래를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않은 예술,
그 예술은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예술이 건네는 삶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하게 강해질 수 있고,
또한 부끄럽지 않게 약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뭉크의 나라, 노르웨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