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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공간, 좋은 예술작품에서 자극과 영감받기

by 글쓰는 건축가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나 공간이 있나요? 아마 각자에게 추억이 담긴 공간들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요. 저도 개인적으로 몇 개의 장소가 떠오릅니다.


먼저 생각난 것이 잠실 롯데 월드 앞에 있는 트레비 분수입니다. 얼마 전에 개인적인 업무 때문에 방문하였는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사실 이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 있는 트레비 분수의 ‘짝퉁’입니다. 오드리 햅번 주연으로 유명한 ‘로마의 휴일’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로마의 각종 관광지 중 하나가 이 트레비 분수인데요. 분수에 동전을 던져서 행운을 빈다고 하죠. 저도 아내와 함께 가서 동전을 던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 언제 다시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튼 롯데월드에 있는 트레비 분수는 로마에 있는 원조 트레비 분수의 모조품입니다. 다소 우중충한 지하공간에 있어서 날씨가 화창한 로마의 그것과 직접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죠. 하지만 저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 이제 정말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로 떠나는구나!’라는 예고편 같다고나 할까요? 이 장소에 오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이제 정말 신나는 곳으로 가는구나’ 라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소풍의 설레임을 나누는 중고등학생들을 보면 예전의 제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생각나는 곳은 연세대학교 본관 앞 광장입니다. 제가 다녔던 연세대학교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건물이 본관입니다. 일제 시대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로, 담쟁이 덩굴이 뒤덮은 외관이 운치를 더합니다. 연세대학교에 와본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보셨을 법한 건물인데요. 이 건물 역시 저에게는 약간 특별한 추억들이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의 분들은 아마 ‘남자 셋 여자 셋’이라는 시트콤 드라마를 기억하실 겁니다. 신동엽, 송승헌 등이 출연해서 당시 대학생들의 생활을 그려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 시트콤을 보면서 ‘대학 생활의 낭만이 저런 거구나’ 하면서 동경하곤 했습니다. 거기에 등장했던 건물이 이 본관입니다. 장면이 전환될 때 본관 건물을 잠깐 비춰주곤 했는데, ‘저기가 바로 대학 캠퍼스의 로망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 초년생 때 엄청나게 유행했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있는데요. 주인공인 전지현과 차태현이 연대 본관 앞에서 유쾌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이힐을 신은 전지현이 신발이 망가지자 차태현과 신발을 바꿔 신자고 하는 에피소드인데요. 이 장면 역시 젊음의 풋풋함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 여러 장면들이 많은데 유독 이 장면이 더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제가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미디어의 영향 덕분인지 학교를 다니면서도 본관 앞을 지날 때면 저 역시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남은 대학 생활은 더 즐겁게 보내야 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 가지 기억과 추억이 덧씌워지면서 더욱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사례가 아닌가 싶네요.

이렇게 공간은 추억의 매개체로서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됩니다. 특정 장소에 가면 예전의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그때 당시의 기분이 생생히 떠오르게 되는 거죠. 저에게 트레비 분수, 연세대 본관 앞 마당이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추억이 담겨있는, 마음 속의 안식처와 같은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건축가들의 목표 중 하나가 그러한 장소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해 내는 것인데요. 저번 글에서 소개해드렸던 대학로 샘터 사옥 같은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샘터 사옥의 1층 필로티 공간은 대학로에서 약속을 잡은 연인들이 설레이는 데이트를 시작하기에 딱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연극 예매를 해놓고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남자친구. 조금 늦게 도착한 여자 친구가 서둘러 달려와서 함께 만나고 즐거워하는 풍경이 저절로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아마 이 장소에서 이러한 장면이 수없이 반복되었겠죠. 이 공간에서 사람들 모두 각자 자신들만의 영화를 찍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건축가로서 인생 영화의 배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자 영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건축이라는 것은 기능에만 치우쳐진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감성적으로도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사례들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공간들에 영감을 받고 내 건축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샘터 사옥 필로티 공간의 경우 1~2층이 뚫린 개방감, 벽돌과 바닥 패턴이 주는 따뜻하고 거친 느낌, 건물 전 후면을 연결하는 입, 출구의 구성 등이 어우러져 그런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분석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구현해 내는 것은 역시 건축가의 숙련된 솜씨와 감각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경험과 센스가 동시에 필요한 측면이죠. 저 역시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들은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작품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건축이라는 분야 안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타 영역과의 교류를 통해 자극을 받는 것인데요. 저 역시 건축 전시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여러 전시를 돌아다녀보려고 합니다. 저보다 제 아내가 미술 이나 패션 쪽에 관심이 많아서 같이 다녔던 전시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 영향으로 볼 만한 전시도 많지 않고 아기도 출산해서 예전처럼 다니진 못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자주 보면서 자극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전시는 자코메티, 데이비드 호크니, 마르셀 뒤샹, 키스헤링 등입니다. 자코메티의 조각에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습니다. 거칠게 표현된 얇은 막대기 같이 세장한 사람이 뚜벅 뚜벅 걸어가는 모습, 서 있는 모습에서 고행을 떠나는 구도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의 예술을 찾고자 하는 조각가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가 역시 영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에서는 전 생애에 걸쳐 열정적으로 이루어놓은 방대한 작품세계에 놀랐고, 정해진 스타일이 없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의 유연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첨벙’은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느낌은 있었지만, 수영장의 선명한 파란색과 함께 미국 서부의 자유롭고 나른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한때 패션 디자인을 했던 아내의 영향으로 패션 관련한 디자인 전시도 여러 차례 관람했습니다. 장 폴 고티에의 전시에서는 전위적인 패션이라는 건 이런 것이구나, 패션에 이런 분야도 있구나 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폴 스미스의 전시에서는 밝은 색상과 패턴 등을 활용해서 경쾌하면서도 재기발랄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디자이너의 감각에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예술과 디자인 전반의 여러 분야들을 접하면서 신선한 자극을 받는 것이 건축가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가 영감을 받았던 장소와 공간, 예술 작품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코로나 상황이라 여행을 떠나거나 외출을 하기가 어려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내와 함께 유럽을 여행했던 날들이 그리울 때가 많은 데요. 그럼에도 스스로 찾는다면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투부와 블로그만 보더라도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들이 넘쳐나니까요. 그래도 어서 상황이 호전되어 마음껏 새로운 전시를 관람하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날들이 돌아오길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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