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와 설계공모 함께 들여다보기
최근에 요리경연프로그램인 '흑백요리사'가 대유행을 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시즌인데,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더 재미있어진 느낌이었다. 한 번의 경합으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고,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되는 냉정하고 가혹한 세계. 그 속에서 최고의 맛을 추구하는 요리사들의 열정과 집념이 있어 이 프로그램이 그토록 재미있지 않았나 싶다.
인터넷을 보면 이 흑백요리사를 소재로 한 기사, 글들이 넘쳐난다. 나 역시 그 수많은 글들에 하나 더 보태는 것 같긴 하지만, 시의성이라는 것이 있기에 하나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나는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을 보면 '저것을 우리 건축판에 적용해본다면 어떻게 될까'를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흑백요리사를 예로 들면, 후덕죽 같은 엄청난 경륜과 내공을 가지고 존경받는 건축가가 과연 지금 있나? 라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하기 힘들 듯 하다).
사실 요리사들만 경연프로그램에서 가혹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건축가들도 생존을 걸고 매번 가혹한 경연장에 서야 한다. 공공 현상설계공모가 바로 그것이다. 매번 다른 부지, 다른 프로그램을 놓고 수많은 건축가가 서로 다른 안을 제출하고 좋고 나쁨을 평가받는다. 어찌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현상설계공모가 흑백요리사 같은 요리경연프로그램보다 더 잔인할 수도 있다. 경연에서 떨어지더라도 만든 음식은 대중에게 보여지고 영향을 끼치지만, 현상에서 떨어진 안은 그야말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몇날 며칠, 몇달을 고민하고 작업한 안이 탈락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때 느끼는 감정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렇게 많은 노고와 막대한 에너지가 어찌보면 낭비되고 있지만, 이것을 대체할 시스템, 방법이 마땅치 않다. 다른 시스템을 적용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단점과 불공정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이 주제로 쓰고자 했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고, 다음에 또 다룰 기회가 있다면 언급해보기로 하겠다).
때로는 평가가 부당하다고 하기도 하고 로비가 관여한 것이 아니냐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공정한 심사를 통해 작품의 수준을 평가받는 셈이다.
나도 꽤나 많은 현상설계에 참여해봤고, 지금 이 순간에도 현상설계를 하고 있다. 다른 모든 건축가들이 그러하겠지만,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안을 제출하고 심사를 지켜보는 마음은 정말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기분, 딸을 시집보내고 노심초사하는 마음, 월드컵 결승전 마지막 승부차기를 지켜보는 마음과 비슷한 심정이 된다. 그러고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하면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되는데, 그게 커지면 급기야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라는 억울함에까지 이르게 된다. 마치 정치에 과몰입했다가 내가 원하는 후보가 낙선하면 '부정선거 '를 외치는 상황과 비슷하다. 사실 이 모든 게 'Winner takes it all' 'All or nothing' 의 잔인한 현상판 구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
내가 오늘 주로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렇게 현상공모 등 경쟁의 당락을 결정하는 '평가기준'에 대한 이야기다. 이 '평가기준'이라는 게 과연 완전히 객관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몇 번의 설계공모를 해보았지만, 설계안의 평가는 정량적으로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어떤 기준으로 이 안이 90점인지, 95점인지를 평가할 것인가? 그러니 현실적으로는 제출된 설계안들을 죽 늘어놓고 상대적으로 '이 안이 저 안보다 낫다'는 식의 정성평가, 상대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흑백요리사를 보면 거의 모든 평가가 '생존 or 탈락', 'A 보다는 B가 낫다'는 식의 정성적 상대평가를 한다. 단 한번의 경합에서 점수제를 채택했는데, 이것 역시 어떠한 기준점(안성재의 경우 90점이 사실상 만점이다)을 정해두고 거기서 상대평가를 하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성격의 경합에서 수능시험마냥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평가를 하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정성적 평가, 상대평가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커진다. '취향'에 따라 어떤 안이 선정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선까지는 누구나 납득할 만큼의 수준차이가 존재한다. 흑백요리사로 비유하면, 백종원과 안성재가 둘 다 어떤 사람의 요리가 맛잇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수준 차이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서 토론에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두 사람의 취향 차이에 따라 평가가 갈렸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백종원이 좀 더 대중적인 맛을 추구한다면, 안성재는 좀 더 전문적이고 섬세한 맛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이것도 내 선입견일 수 있다).
실제로 100명의 심사단에 의해 맛 평가를 받는 과제에서, 두 명의 심사위원의 선택을 받은 흑 요리사 측의 요리가 전체적으로는 30표 이상의 차이로 완패를 당했다. 이것은 심사위원 두 명의 맛 평가가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한다. 물론 100명의 심사단은 일반 대중이기 때문에, 완전히 전문적인 영역의 심사는 어렵고, 두 명의 심사위원은 그 동안의 경력과 성과를 통해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공정'하고 '전문'적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심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명의 심사 또한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현상공모의 평가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심사위원의 취향에 따라 어떤 안이 선정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어떤 심사위원은 컨셉을 세게 강조한 다소 과격한 안을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심사위원은 문안하게 주변과 어울리는 안을 좋아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심사위원은 의식적으로 본인의 성향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심사에 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심사위원도 사람이기 때문에, 백종원이나 안성재처럼 주관적인 기준이 아주 조금이라도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현상공모의 안을 제출할 때 내 안이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을 것이라고 '운'에 맡길 것인가. 그것은 너무 막연하고 무책임한 전략이다. 내가 생각하는 해법은 '일단 그 성향(취향)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 장점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아라'라는 것이다.
흑백요리사에는 다양한 분야의 요리사가 출현했다. 파인다이닝, 중식, 한식, 일식 등등. 각자가 각 분야, 성향을 대표하는 요리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인다이닝의 손종원, 요리괴물, 이준, 삐딱한 천재 등등. 중식에 후덕죽, 중식마녀 등. 한식에 임성근, 술빚는 윤주모, 선재스님 등. 일식에 최강록, 정호영, 부채도사 등... 이렇게 각 분야에 최고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모였다. 이 사람들이 '아 내가 중식(또는 다른 분야)라서 불리하구나. 분야를 바꿔야 겠다'라고 생각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든 그 분야에서 더 실력을 갈고 닦아서 최고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심사위원의 취향을 생각하지 말고, 그 성향의 설계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만들어 정점을 찍어야 한다. 어떤 안들을 볼 때 객관적으로 그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수준 차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설계수업의 학기 말에 A+를 받는 학생과 C를 받는 학생은 설계를 전혀 모르는 우리 어머니, 내 와이프가 보아도 구분할 만한 퀄리티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교수 입장에서는 학생이 어떤 스타일로 해왔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이루면 점수를 잘 줄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단 A~A+ 정도에 거론될 수 있도록 퀄리티를 만들어야 한다.
흑백요리사를 보면, 두 심사위원이 의견이 갈려 긴 시간 토론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보통 둘 다 뛰어나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될 때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데,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상황은 '둘 다 정말 훌륭하고 맛있을 때' 나온다는 것이다. 일단 둘 다 정말 맛있어야 거기서 취향 차이로 승부가 갈릴 수 있다. 어떤 성향이든 최고의 맛을 만들지 못하면 토론과 취향 승부로 이끌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그 분야, 성향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든 성과물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흑백요리사에서 결승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무한요리지옥'이었다. 당근이라는 하나의 식재료로 최대한 다양한 맛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였는데, 평소에 여러 분야의 요리를 조합하거나 변주하는 스타일의 요리를 하는 파인다이닝 분야의 셰프들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중식 분야의 후덕죽 셰프는 중식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당근모양의 딤섬부터 깐풍스타일, 급기야 당근을 면으로 하는 짜장면까지 만들어낸다. 나는 이것이 후덕죽 셰프가 중식의 매력과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들이라고 보였다. 물론 당근이라는 하나의 재료로 이토록 다양한 요리가 가능했던 것은 후덕죽 셰프의 요리내공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현상설계에서도 어떤 스타일로 성과물을 만들었다면, 그 장점과 매력을 극대화해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정 투시도나 조감도, 혹은 엑소노메트릭 다이어그램에 힘과 밀도를 집중시킬수도 있고, 도면을 극도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스터디를 많이 했다면 그 과정들을 많이 표현할 수도 있고, 상세를 연구했다면 디테일 도면을 강조할 수도 있다. 아무튼, 기껏 연구하고 고민했던 것들을 심사위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이 정도로 정말,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는 제출하고 내 안이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도록 기원해야 한다.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해야 할 시간이다. 정말 운에 기대는 것은 이 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설계공모를 하시는 거의 모든 분들이 이미 잘 아실만한 내용을 장황하게 떠든 것은 아닌가 싶다. 흑백요리사가 워낙 유행이라, 이와 연관해서 생각했던 것들을 글로 한 번 적어보고 싶었다. 흑백요리사의 셰프들 못지 않게 많은 건축인들이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고 있다. 오늘도 설계공모에 도전하는 많은 건축인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