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라는 제자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간혹 본다. 밥상을 앞에 두고 아이와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아이의 동생도 보인다. 어느 사진에는 임신한 사진도 있다. 셋째 아이를 가진 것 같다. 그가 카톡에 올려놓은 사진을 바탕으로 임신 연도와 출산 연도를 가늠해본다. 왠지 내가 속상하다.
모 대학교에서 행정학 개론 강의를 할 때, 내 강의를 들었던 제자다. 나는 강의 시간에 맞춰 차를 몰고 강의실로 갔는데, 강의실에 가는 길에 강의실로 가고 있는 그 학생을 마주치면 내가 차에 태워서 같이 강의실로 가곤 했다. 그녀는 졸업반이었고, 졸업 직전에 결혼할 남자 친구를 소개해 주었고,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더없이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그 여학생은 대학 졸업 직후 결혼을 했고, 나도 결혼식에 가서 축하해 주었다. 이후에 서로 소식을 전하지는 않지만, 나는 간혹 그 학생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통해 근황을 짐작하고는 한다. 사진 속에서 그 학생은 행복하게 웃고 있지만, 나는 왠지 속이 상한다. 수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못내 아쉬운 점은 그 학생이 자신의 커리어라고 할 만한 것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로 결혼과 출산부터 했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물론 행복한 순간이 많겠지만, 또 얼마나 많은 순간 자신의 성장에 목마름을 느낄까 생각하면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 커리어를 충분히 개발한 후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결혼 후에는 비교적 결혼생활에 전념하면 될 것이고, 매우 바람직할 것 같다. 나는 나의 삶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 탄탄한 커리어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멋진 커리어를 형성하기 위해 대학생활 내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현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나는 대학원 석사 과정 재학 중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졸업을 하기도 전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였다. 그 길로 아이 양육과 커리어 개발을 병행해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 이어졌다.
결혼하기 전에 어쩌면 그렇게 결혼의 결과랄까 효과랄까에 무관심했을까. 결혼과 출산의 결과에 대해 나는 왜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으니 당연히 쉽게 졸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나마 석사과정은 임신상태에서 석사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사과정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세 아이를 돌보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는 일은 몹시도 힘든 일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결국 성장이었다. 세 아이를 돌보면서도 박사학위 논문 작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성장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정을 꾸리고, 가부장제적인 남편의 통제 하에서 세 아이를 돌보면서 내가 성장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 남편의 통제, 말투 등은 내 결혼생활의 날씨를 몹시도 추운 것으로 만들었다. 성장하기에 결코 좋은 환경이 되지 못했다. 가족들을 돌보면서, 나의 노력, 시간, 에너지는 너무도 쉽게 고갈되어 갔다. 그래서 나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는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종종 인도 블록 사이에서 힘겹게 피어난 꽃을 보게 되는데, 결혼한 여성이 살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신의 성장을 이어나가는 일은 아마도 그런 인도 블록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죽지 않고 살아남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가족을 위해 가사노동을 하고 남편의 통제를 받으며 독박 육아를 하며 나의 성장을 지속하는 것을 ‘틈새에서 성장하기’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자신의 커리어와 임신 및 출산 계획을 잘 세워서 멋진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래서 나의 성장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을 때, 그래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나 협소해져 버렸을 때, 그리고 가부장제 하에서 남편이 다소 폭력적 행동을 할 때, 그래서 자존감이 무너져 내릴 때, 성장하고 싶지만, 도저히 성장할 힘이 없을 때, 그럴 때에도 우리는 최소한의 틈새에서도 성장을 지속하고자 결심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광활하기만 했던 삶의 공간이 결혼 및 출산을 거치면서 한없이 좁아져 버렸다.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낳았고, 매일 사랑하는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나의 성장을 위한 공간과 시간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이 특별히 육아에 있어서 무임승차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나는 늘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는데, 결혼생활의 분위기랄까 날씨랄까 환경은 늘 춥기만 했다. 결혼생활에서 어느 누구도 명백하게 잘못한 사람은 없었지만,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서는 여성은 성장을 멈추어야 하는 것 같았다.
성장에 대한 욕구랄까 또는 성취욕구랄까 하는 자기실현 욕구가 강한 젊은 엄마는 쉽게 좌절한다. 그런데 좌절된 욕구가 생존 욕구가 아니어서일까. 우리의 좌절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 우리 자신 밖에. 정작 남편에게는 제대로 된 전쟁도 한번 못해 보고 가정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스트레스를 풀고는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는 결국 엄마 자신이 상처를 받고.
그 힘겨운 시간을 어느 정도 지나온 지금,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크다. 가부장제와 같은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면, 정작 내가 누구와 전쟁을 해야 했는지 제대로 알았다면, 내게서 운전대를 빼앗아 가려는 남편에게서 당당하게 내 삶의 운전대를 되찾아 왔더라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 같다. 남편을 두려워하며 남편의 관점을 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내 감정과 욕구를 억압하며 살았던 순간에 대해 후회한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자신의 성장을 위한 공간이 한없이 좁아져 버린 젊은 엄마들을 응원한다. 내 딸과 여성 후배들은 자신의 성장 욕구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의 가치관대로 멋진 인생을 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