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차례를 지내고 나서, 고모네도 와서, 오랜만에 대가족이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님은 매년 하시는 이야기를 또 하신다. 다리가 아파서 힘들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버님이 당신께 따뜻하게 안 해 주시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하신다. 당신은 복이 없는 것 같다고 하신다. 결혼 70년이 되었는데, 도대체 행복한 기억이 없으신 것 같다. 그저 들어드리면 될 것을 남편은 어머님을 가르치려 든다. “엄마,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세요. 남편도 살아 있고, 엄마도 다리만 좀 불편하실 뿐 건강하시지. 난 참 복이 많구나 하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남편들은 다 그래요. 밖에 가면 잘하고, 집에 오면 잘 안 해요.”
남편은 어머님께 인상을 펴시라고 하고, 한 생각만 좀 바꾸어 보시라고 거듭거듭 요청한다. 그런 말을 옆에서 듣고 있으면, “관점의 전환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에세이집을 준비하고 있고, 남편에 대한 비난과 원망이 주된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남편은 관점을 좀 바꾸어 보라고 했다. 내가 힘들었던 일만 자꾸 생각하냐고, 좋았던 일은 없었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남편의 말을 들어도 나의 관점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가진 관점에서, 나는 피해자이고 남편은 가해자였다. 사람의 관점은 바뀌기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적절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전환될 수 있는 것이 관점이다. 그런데,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어머님께는 도대체 관점의 전환을 가져올 만한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아버님 어머님의 결혼생활 70년 동안, 내가 지켜본 기간이 25년이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님은 아버님의 곁을 지켰다. 아버님의 세끼 식사를 챙기셨다. 도대체 어떻게 관점이 전환될 수가 있었을까?
최근에 나는 몇 가지 관점의 전환을 경험했다. 먼저, 남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에 대한 이런저런 원망을 갖고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작은 조직이지만, 조직생활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다 보니, 남편도 조직생활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또는 조직은 전쟁터이다. 조직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전쟁터에 뛰어드는 일이고 정치를 시작하는 일이다. 조직생활을 한다는 것은 갈등을 견디는 것이다.
조직에 머무르기로 결정하는 것은 조직이 정의하는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러 정체성이 있지만, 직장 생활은 부자연스럽게도 우리에게 단일한 정체성을 강요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똑같은 업무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곳에 갇혀 회사에서 지정한 정체성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타인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 그러니까 우리 정체성은 직장에 의해서 형성된다.”(링엄, 2018, 64).
관료제 하에서는 무의미감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내가 조직에서 계속 일한다는 것이 가족에게 중요해지자, 나는 가족을 위해서 조직에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게 조직생활은 군대 의무 복무 기간처럼 느껴졌다. 작은 조직이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은 내가 예전에 갖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직장생활을 거의 30년가량 했으니, 군대 복무를 거의 30년 가까이 한 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은 가족을 위해 삶을 온몸으로 견뎌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 또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모두 가여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일하러 가기 전에 빨래를 널면서 나 자신이 노예 같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조직 속에서 늘 노예 같다고 느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 후에 집에 빨리 오지 않고 직장에서 더 머무르다 오고는 했는데, 남편이 퇴근 후에 자기만의 시간에 무언가를 해 보려고 애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퇴근 후에 집에 들어오면서 늘 나에게 짜증을 내는 점이 속이 상했는데, 퇴근 후에도 남편의 머릿속에서는 조직의 일들이 재생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동안 남편에 대해 원망스러웠던 많은 부분들이 감사할 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의 잔소리가 싫었고, 남편의 공격적인 말투가 싫었다. 그런데 퇴근해서 생활관에서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서, 말을 할 상대가 없는 경험을 하자, 남편의 잔소리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든 집에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비록 작은 조직이지만, 지시를 내려야 할 일이 있는데, 지시를 내리는데 필요한 관료제적 언어가 필요한데, 사적 관계에서 또는 정서적 관계에서 쓰는 말투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나의 말투 또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점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이런 관점 전환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1년 계약으로 서울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생활관에서 나 혼자서 살게 되면서, 나는 주중에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었다. 남편과 떨어져서 남편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가사노동과 아이 양육을 하면서 일을 하니, 남편은 자기 일만 하면 되니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바로 아이 양육과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일만 하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
대구가 아니라 서울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엄청난 변화를 통해서 나는 어느 정도 관점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어머님은 내가 가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셨다. 직장에서 일을 하지도, 남편과 떨어져 지내지도, 그 연세에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지도 못하셨다. 70년이라는 엄청난 기간의 결혼기간 동안 어머님의 상황은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어떻게 어머님의 관점이 전환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는 것 자체가 특권인 것이다.
우리는 역지사지하라고 너무도 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매일매일 내게 당장에 해 치워야 하는 설거지거리가 밀리고 요리가 있고 청소가 있는데, 어떻게 상대 입장에 서 볼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그 일을 제대로 못했을 때 상대가 나를 비난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방어적인 자세를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상대의 입장에 서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어머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남편은 어머님의 입장을 잘 헤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참고문헌>
링엄, 로버트 (2018). 탈출하라(이주만 역. 원저 Escape Everything by Robert Wringham). 카시오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