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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Oct 28. 2020

도대체 집이란 공간: 서울에서

나는 막연히 집을 떠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고는 했었다. 집을 떠나서 나 혼자서 생활한다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고 환상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2019년 9월부터 2020년 8월까지 나는 서울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10년 동안 일을 하고, 11년째 강사법 파동으로 강의를 받지 못했고 쉬게 되었다. 그때 서울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가족을 떠나서 서울에서 혼자 생활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서울에서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갈등하게 되었다. “나는 29살 생일에 죽기로 했다”라는 소설을 생각하며, 1년 후에 어떻게 되든, 1년간 서울에서 일해 보기로 했다. 적어도 일 년 간은 남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막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고서 홀가분한 입장이 되어서 일을 하러 서울에 오고 보니 꼭 휴가를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특히 내가 얻은 원룸이 서울대입구역 근처 샤로수길에 있어서 나는 매일매일 샤로수길에 가게 되었고, 샤로수길에 놀러 나온 대학생들처럼 샤로수길의 나의 집에 갈 때마다 나는 매번 즐거운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대구 집을 떠나 서울 집에 살게 되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대구 집을 떠나자 비로소 본질이 보였다. 본질은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 집에서 한편으로는 홀가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운 약간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가족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일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일을 떠나서 그 일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는 때이다. 가족과의 사랑은 인생의 매우 본질적인 부분에 해당한다는 것을 가족을 떠나보니 알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는 이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 대구 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저 힘겹게만 느껴졌다. 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가사노동이 너무 많아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고통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서울 집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대구 집에서의 바빴던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눈물이 났다. 너무 행복하고도 너무 힘겨웠던 시간들. 김광석의 노래처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너무 많은 가사노동은 사랑이 아니다.

서울에서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며칠간의 약간의 흥분을 거쳐 나는 어느 순간 그곳도 천국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서 주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나는 약 5평 정도의 원룸에서 살았다. 원룸을 얻으러 다닐 때 나는 방의 사이즈에 많이 놀랐다. 내가 부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월세로 얻을 수 있는 방을 몇 개 보았다. 처음으로 몇 개의 방을 둘러본 날, 이런 좁은 방에서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다음에 방을 둘러볼 때에는 보증금의 액수와 월세의 액수를 좀 더 높여 보았다. 방의 사이즈가 약간 더 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작은 방만이 가능했다. 더 많은 돈을 주면 물론 더 넓은 방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고, 얻게 된 방은 크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사람의 적응력이란 놀라워서, 나는 방이 그다지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체념했다. 그런 방이 그곳 원룸의 표준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막상 살면서 정작 숨 막히도록 어려운 점은 좁은 화장실이었다. 나는 내가 좁은 화장실로 인해서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을 줄 몰랐다. 방 사이즈를 좀 줄이더라도 화장실 사이즈를 좀 더 늘렸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의 삶이 얼마나 숨 막히는지 나는 매일 체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연구원 계약 1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넓은 방과 넓은 화장실을 쓸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매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넓은 주방에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맘껏 요리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가는 순간 가족들은 요리며 빨래며 설거지거리를 나에게 떠안길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하면서 가사노동을 혼자서 할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이 천국은 아니지만, 나는 버티겠다고 결심했다.

샤로수길의 원룸에서 한 달 반 정도 살고 나서, 대학교의 스튜디오식 아파트인 생활관으로 이사했을 때, 넓어진 공간으로 인해서 무척 행복했다. 나는 좁은 원룸을 잠깐 경험하고 벗어났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 좁은 공간의 비용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이 어떻게 이 높은 월세를 감당하면서, 그 좁은 공간에서 헉헉댈지를 생각하면 그저 아득해질 뿐이다.

난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원룸에서 사는 동안에, ‘이 편’의 문제에서 ‘저 편’의 문제로 넘어온 기분이었다. 가족 관계에서의 불평등한 가사노동과 굴욕의 문제에서 주거에서의 굴욕 문제로 넘어온 것이었다. ‘이 편’의 문제도 ‘저 편’의 문제도 심각하기 이를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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