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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군 Jun 26. 2020

그해 여름, 그리고 겨울

1

앞으로 잘 될 줄 알았다.

뭐든지 잘 해낼 것이라고 믿었던 나이였고, 그럴 수 있는 시기였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던 그날에 다니던 회사를 나와 지금 생각해보면 어쭙잖게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일 때부터 결과는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고작 6년의 경력으로 세상만사를 다 깨우친 것인 양 으스댔고, 뭐라도 된 것인 양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결과만 말한다면 대차게 말아먹었다.

회사가 휘청일 때 덮쳐온 통학버스는 나의 통근용 차량과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반년만에 병원에서 나왔을 때 나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비난과 수억 원의 부채였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얄팍한 사업모델을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인 양 뛰어다녔던 수년의 시간은 이렇게 공중에서 흩어지고 나의 소중한 시간과 사람들 역시 함께 흩어졌으나 이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서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나와 반년만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이 지나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는 가을에 닿았을 때였다.

내 방안의 모든 게 생경하게 느껴졌으며, 병원 침대에 완전히 익숙해진 내 몸뚱이는 오랜만에 걸터앉은 침대 모서리조차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쯤은 머릿속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는 온갖 독촉 메시지로 가득 찼고,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의 집기는 내가 확인할 새도 없이 모두 사라졌으며, 이렇게 망가진 내 커리어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무런 방법조차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하지?

현실감은 예고 없이 갑자기 닥쳐왔고 모든 것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봐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지고 아무도 없는 내 방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빠르게 답답해져 왔다. 

밖의 초인종 소리에 예민해지고, 휴대폰 알람에 흠칫거리는 내 모습에 점점 나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 현실감이 주는 압박감이 희석되면서 무모한 자신감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제 프리랜서로 살아가 보자. 과거 레퍼런스가 그래도 있으니 뭐라도 달려들어서 해보면 되지 않겠어? 일단 부딪쳐 보는 거지. 따위의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시금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고작 몇 번의 전화통화만으로 사실 낌새는 느껴졌지만, 외면하면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읍소하면서 돌아다녔으나 잠시 외면한 현실이 이제는 눈앞에 나타났다. 사업하다 망한 사람을 누가 쉽게 믿고 써주겠는가.


다행히도 몇 가지 도움과 기회가 생겨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지만, 역시 현실의 벽은 암담했다. 한 곳은 최저임금 수준의 최악의 상황에서 일을 해야 했고 나머지 한 곳은 직접 채용은 어려우니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외부에서 도와달라는 제안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내 입장에서는 뭐라도 해야 했기에 두 가지 일을 모두 억지로 붙잡고 갔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일은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고, 시간은 점점 모자라기 시작했다.

일에 계속 소홀해지고, 압박감은 커져갔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내가 가진 체력과 정신력도 좀먹어갔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계속 눈앞에 있는 것만 좇으면서 가끔씩 떠오르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도망 다녔다.


때가 왔다.

외면했던 현실은 더 큰 문제로 다가왔고, 당장의 생존에 집중하던 나는 미래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던 나의 지난 행동은 가장 빠르게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는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내 나이도 점점 많아졌다.




2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계기는 정신없이 눈앞만 쳐다보다가 어느 날 고개를 돌리던 날이었다. 내 친구들은 어느새 직장에서 승진을 했고, 결혼을 준비하고, 대출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다고 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일로 느껴지면서 갑자기 속 깊은 곳부터 무언가가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무언가를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과 의지는 나를 위함이 아니라 오롯이 등에 짊어진 알량한 책임감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제 날짜에 빚을 갚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일을 찾고 돈을 좇기 시작한 지도 수년이 흘렀고, 좀 더 많은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무거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직장을 구했지만, 오랜 시간 닳아버린 내 영혼은 제대로 무언가를 해내기에는 버거운 상태였다. 힘겹게 계속된 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겨우 고개를 돌릴 여력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싶을 때 나에게 돌아온 것은 임금 체불이었고, 미련하게 경영진을 믿고 기다려주는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창 밖을 바라보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김이 새어 나오는 날씨에서 조용히 생각을 더듬어 가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가치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써 마음을 다잡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벗어나기에는 너무 많은 짐을 어깨에 들쳐 메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걱정거리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니 모든 것들이 별 것 아닌 것인 양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누가 사고로 다쳤다고 해도, 지인에게 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메말라버린 감정은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무런 고민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좀먹어가던 삶이 이어지고 있다.



3

2008년 장미란 선수가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는 그때 나는 희귀 난치성 질환 판정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병명에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해 잘못된 검색어로 이것저것 검색을 했었는데, 한 달이 지난 후에서야 제대로 병명을 인지하고 내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급성으로 진행된 병은 내 몸을 힘들게 만들었고, 결국 입원 및 정밀검사를 통하여 진단 확정과 의료보험 혜택이 변경되었다. 이미 15년 전 집안의 부도로 인해서 메말라간 감정의 영향인지 최악의 경우 중증 장애인 수준으로 몸이 망가질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조차 감흥 없이 설명을 받아들였고, 이후 수년간 지겹도록 내 손으로 주사기를 꽂아갔다. 


매달 의료보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원의 처방약 비용은 경제적으로도 내 삶을 옥죄면서 계속된 위기감을 고조시켰는데, 아마도 3살만 더 나이를 먹었었다면 사업을 하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시도는 제고하지 않았을까?

이미 너무 많은 이벤트가 삶 속에서 터져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내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결정을 나는 너무 쉽게 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2018년에는 내 삶의 즐거움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무한도전의 종영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재도전한 사업도 종료가 되었다. 나이를 먹고 절치부심하여 준비했으나 함께 사업을 준비한 동업자의 횡령은 무언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다시 나를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힘겨운 사업체의 정리와 새로운 조직으로의 취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잊힐만할 때 다시 새겨진 주홍글씨는 더욱 선명하게 내 이마 한가운데 자리 잡았고 약점을 붙잡고 이용하려는 하이에나들은 순식간에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청산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일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예상했었지만 올라오는 구토 감은 막기 어려웠다.


10년의 고행을 거치면서 거칠게 다듬어진 내 영혼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삶으로 인도하고 있다.

과거를 조금이라도 던지기 위해서 발버둥 치면서도 현재 나 스스로를 관조하며 나의 두려움을 인정하려 노력 중이다.


삶의 실패와 두려움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실패한 자만이 두려움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두려움의 본질은 내가 겪은 실패를 투영한다. 애초에 일어날 일이 없다면, 두려움이 생길 일도 없다.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을 안고 간다.

누군가는 학자금 대출을. 누군가는 갓 태어난 아이를. 혹 누군가는 내 친구의 실패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은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먼저 찾아온다.

스스로는 알지만 인정하지 않기에 더욱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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