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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몽블랑 만년필

by 얼음마녀

까마득한 20대에 몽블랑 만년필의 유명세를 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감히 가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20대 중반 첫 유럽여행을 떠나면서 공항 면세점 유리창 너머로 몽블랑 만년필을 보았고 그냥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땐 독서도 별로 하지 않았고 글 쓰는 것이나 필사를 한 적 없기에 갖게 되더라도 별 쓸모가 없었지만 막연한 동경은 그때부터 내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나 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난 몽블랑 만년필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네 자루가 되었다. 2015년 7월에 6급으로 승진을 하고 나를 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인터넷을 통해 헤리티지 레진이라는 아주 묵직한 만년필 M촉을 구입하게 되었다. 만년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M촉은 굵은 촉, F촉은 가는 촉이라는 기본만 알고 있었다. 몇날 몇일 저녁을 눈 빠지게 인터넷 검색하고 몇 번이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뺏다를 반복하며 구입했던 첫 몽블랑 헤리티지 레진은 너무도 성공적이었다. 묵직한 점이 단점일 수도 있지만 그 묵직함으로 오히려 잡았을 때 안정감이 있으며 굵은 촉을 통해 술술 나오는 잉크는 머릿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마구마구 솟아나게 할 것만 같았다.


사람은 하나를 갖게 되면 또 다른 걸 갖고 싶어 한다그렇게 몽블랑 만년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자 하나 더 갖고 싶었다. 인터넷 카페에서 수십 번 검색하다 149는 너무 크고 부담스러울 거 같아서 146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몽블랑 두 자루가 된 해에 몽블랑 어린 왕자 에디션이 출시가 되었다. 어린 왕자의 모습이 펜촉에 새겨진 만년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인터넷을 수십 번 들락거리며 결국 몽블랑 르그랑을 구입하고 말았다.


이제 몽블랑 만년필은 이제 그만 사야지 하고 있을 때 가방을 구입하기 위해 몽블랑 매장을 방문했고 거기서 생텍쥐페리 펜을 매장 직원이 보여준 순간 그 헬리콥터의 표면이 표현된 뭉툭한 그 펜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교육 기념으로 결국 구입하고 말았다 몽블랑은 매년 고가의 작가 에디션 시리즈를 만들어내서 애호가들의 지갑을 털어간다. 내가 최초 구입한 똑같은 작가 에디션보다 더 비싼 게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젠 네 자루로 충분히 만족하며 추가로 더 구입할 생각은 없다.


나중에 내가 우주의 먼지가 되는 날까지 이 펜들은나와 함께 할 것이고 내가 떠난 이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자녀들은 만년필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 물려주기도 곤란할 것같다. 그렇다고 팔아 해치우진 않겠지만 펜이란 누군가 계속 사용해야 하는 법이라 내가 지구를 떠난 후 계속 방치만 되고 있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펜 한 자루도 못 들 만큼 노령으로 인해 손이 덜덜 떨린다면 미리 내가 팔아버려야겠다. 아니 팔기 전에 자녀들에게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지.


지금 와 생각하면 굳이 네 자루까지는 필요 없고 두자로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물론 만년필 카페 가보면 몽블랑이 열개 아니 수십 자루 가진 사람들도 많지만 나의 주력 펜은 여전히 헤리티지 레진이다. 주기적으로 세척도 해줘야 하는데 쓸 때만 쓰지 세척은 상당히 귀챦다. 세척을 제때 해주지 않으면 노즐이 막힌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 불편함도 있다.


어떤 사람은 한 자루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만년필이 여러 자루가 필요하나 하지만 그 이유는 잉크에 있다. 가령 검은색 잉크를 쓰다가 다른 색을 쓰고 싶은데 그 잉크를 빼고 다른 색으로 바로 갈아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몽블랑 네 자루 각각에는 검은색, 녹색, 브라운, 레드 이렇게 잉크가 주입되어 있다. 어떤 펜은 붉은색 어떤 펜은 검은색이 잘 나오기에 주로 한펜에 꾸준히 같은 잉크만 넣는 편이다. 일반 저렴한 펜들도 가성비 좋은 것들이 많다. 몽블랑 외에 트위스비 만년필을 두자로 가지고 있는데 그건 M촉이어도 굵기가 몽블랑만큼 진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 두 개의 펜에는 중국산 잉크 진하오 핑크와 파랑을 넣어두었다. 가끔 펜으로 여행지 그림을 잘그리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주로 몽블랑 만년필은 독서를 하고 난 후 중요한 책 페이지 부분의 귀퉁이를 접어두고 그 부분을 노트에 옮겨 적는 데 사용한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노트에 옮겨지는 문장은 오롯이 나의 문장이 되는 거 같다. 특히 몽블랑 퍼머넌트 블랙잉크는 일반 잉크보다 더 진하게 나오는 거 같다. 몽블랑 만년필에는 몽블랑 잉크를 넣어줘야만 할거 같아서 블랙, 토피 브라운, 에메랄드 그린, 라스피 라줄리, 조디악의 전설 이렇게 있지만 이 잉크를 다 쓸려면 지금 상태로는 10년 이상이 걸릴 거 같아 지금 잉크를 다 쓰기 전엔 새로운 잉크를 들이지 않을 계획이다. 잉크와 궁합이 맞는 펜이 있듯 펜과 궁합이 맞는 노트도 있다. 내가 써본 것 중에는 로디아나 로이텀이 내 펜들과 궁합이 맞았다. 나중에 문장을 다 옮겨 적고 난 후 진한 잉크로 각인된 노트 위의 나의 필체를 보고 만족한다.


사실 처음에 몽블랑을 들이기 전에 40대 중반부터 우연히 독일제 중저가 만년필 라미를 알게 되어 라미의 매력이 푹 빠져 만나는 사람마다 라미 만년필과 몰스킨 수첩 홍보하느라 바빴다. 라미는 일회용 카트리지도 있고 주입해서 쓰기도 하지만 여행이나 이동시 펜을 쓰다가 헐거워져서 잉크가 샌 적도 많았다 처음엔 노란색, 핑크색 라미 펜을 구입하고 인터넷으로 초록색 구입하고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흰색까지 구입을 했었다. 하지만 라미는 잉크 흐름이 복불복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초록색과 런던에서 산 흰색은 기존에 있던 핑크색보다 잉크 나오는 게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슬슬 라미 만년필 사용량이 줄어들고 이젠 다용도 룸에 있는 박스 속에 모셔져 있다. 사무실 갈 때 외출 시에 내 가방에 항상 들어있는 건 몽블랑 네 자루와 로이텀 1년 다이어리다.


꼭 몽블랑이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만년필 사용의 효율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일부는 구입한 사람도 있지만 후기는 그렇게 열광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몽블랑 만년필을 한번 사용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러면 혹시 마음이 달라질지 모르겠다. 멋지게 상상되는 한 장면은 정장 슈트를 입고 가슴이나 주머니 포켓에 몽블랑 만년필 한 자루를 끼고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정장 대부분은 주머니에 박음질이 되어 있어 펜을 넣기 어렵다. 그럴 때 끝부분을 조금 터서 그 부분에 펜을 꽂아보았다. 그 후 내게 생긴 건 두려움이다. 이러다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였던 것이다. 사무실 책상 위에 맘 놓고 놓을 수도 없다. 이장회의가 끝나면 이장들이 우르르 책상 주변에 몰리면서 집히는 대로 펜을 집어가 사용하다 펜이 분실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성펜이었지만 만년필이라면 어쩔 뻔했을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만년필 홍보를 해도 절대적으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내가 골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개인이 어떤 취미와 취향을 갖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개인적으로 축적된 그 무엇이 있다. 아무리 유용하고 남들이 추천하는 취미라 할지라도 본인 맘이 끌려야 하는 법.

누군가는 부인이 사무관 승진하면 결재용으로 몽블랑을 사주겠다고 했는데 나 같으면 미리 구입하고 사용하면서 사무관 승진을 기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왕 사용할 것이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사용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요즘은 과거처럼 당신의 취미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굳이 알릴 필요도 없어졌다.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온라인 카페 모임에서 은밀히 활동하면 된다. 하지만 가끔 이 은밀한 취미를 주변 동료들에게 발설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이제 참으려고 한다. 은근히 비싼 만년필 자랑하나 싶은 것으로 비칠 수도 있고 내가 몽블랑 만년필을 말하는 순간 듣는 상대는 아득히 먼 곳을 상상하며 영혼이 이탈되는 거 같다. '그게 스위스에 있는 산이야?' 어찌 되었건 직장에서 일 이외에 개인적 취향을 드러내거나 하면 그게 언제 편견이 되어 날 괴롭힐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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