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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하면서 하루키가 이야기해준 것들

by 얼음마녀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 간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 들일수밖에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팬이라 그가 쓴 에세이는 필사적으로 찾아서 읽는 편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처음 나왔을 때가 내가 20대였는데 읽긴 읽었는데 읽은 것 같지 않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한번 읽었다고 하는 책을 기억이 나든 안 나든 다시 펼쳐보기란 쉽지 않다. 그가 쓴 소설 몇 개도 읽어보았지만 하루키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서 위트와 재치가 더 와닿는다.


읽고 좋았던 그의 에세이는 '라오스엔 뭐가 있는데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버스데이 걸', '먼 북소리', '위스키 성지여행'등이 있다. 그의 에세이에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맞서기보다는 이내 달관하는 듯한 그의 성격 같은 걸 엿볼 수 있고 때론 삶을 영위해가는 인생의 어떤 비법 같은 것이 숨어 있지 않나 싶다. 때론 그의 생활습관을 따라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글을 쓰고 휴식시간에 산책을 하고 서점에서 책을 사서 근처 와인바에 가서 책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것 같은 것이다. 삶을 그처럼 즐겨야만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가 처음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야구장에서 어떤 계시 같은 걸 받고 우연히 작가가 되었고, 또 그 작가 생활을 하면서 건강하게 삶을 유지시켜 나가고자 달리기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보면 대충 자유롭게 사는 듯해도 그의 인생에는 큰 플랜과 루틴이 보인다. 책 읽기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가 그래도 가끔씩 하루키 책을 찾아서 읽는다는 것도 하나의 독자를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기에 충분한 그만의 독특한 필력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그의 책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메시지를 찾아 느껴보는 것이 상당히 즐겁다.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이 책 제목만 봐서는 달리기나 마라톤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고 처음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지속 가능한 삶을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한 그는 미국이나 그리스에서도 마라톤 대회 참가하면서 느낀 이야기와 그와 수반되는 인생에 대해 잔잔하게 이야기해준다. 그의 문장들은 촘촘히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시각을 통해 머릿속으로 조용히 빨려 들어온다. 기록해야 할 부분에선 책 귀퉁이를 접어두고 그걸 펼쳐 볼 때마다 얇은 책장 하나하나가 손끝에서 나풀거린다. 만년필로 밑줄을 긋고 싶어도 줄 하나 긋기 아까울 정도다. 이 책을 썼던 시기가 그의 나이 50대 후반이고 현재로 보면 그는 70살이 넘었다. 고령이라고 생각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건강하게 삶을 유지하고 있고 여태껏 작품을 내고 있으니 그만큼 성공한 인생이 어딨을까.


아등바등 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데로 누군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라고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람들 만나기 싫어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면에서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격하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런 성격은 어쩌면 작가라는 직업을 꾸준히 이어가게 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고 여기저기 막 쏘다니고 차분히 앉아있을 수 없이 엉덩이를 들썩이는 성격이라면 작가 생활하는 게 좀 쑤실 수도 있을 거 같다.


나와 아내는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북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 나이도 50이 넘어가면서 이 나이 듦에 대한 상태를 글로 어떻게 표현을 해볼까 많은 생각을 했지만 딱히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었다. 나도 20대에는 50대를 전혀 예상하지 않아서 얼른 30,40대가 되기 바랐지만 50대가 되는 것에 대해 상상을 할 수가 없어서 50대가 되는 것도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고 또 언젠가 죽는다는 진리는 자명하다. 나도 이렇게 엉겁결에 50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 50대 후반이다. 21세기라는 것이 실제로 다가와서 내가 정말로 50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젊었을 때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언젠가 21세기가 오고(아무런 일이 없다면) 그땐 내가 50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젊었을 때의 나에게 있어 50대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을 정도로 곤란한 일이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처음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그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일이라면, 좀 더 분명하게 여러 가지 일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처음 겪는 일이기 대문에 그렇게 간단히 치부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나로서는 구질 구레한 판단 같은 건 뒤로 미루고 거기에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우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하늘이나 구름이나 강을 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우스갯거리가 예외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제의 인생에 있어서는 만사가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절에서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의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이다. 그가 전해주는 소식은 내용이 조금도 나아지는 법은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두 번째 계획이 필요하다.


운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다 큰 난관을 만나면 그게 혼자만의 자만이었나 싶다. 오십이 넘으면 인생이 편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오십이 되어 여기저기 굴곡진 언덕을 만날 때마다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어쩌면 오십의 언덕은 편안한 어떤 곳이 아니라 건강, 직장, 퇴직 등 예측 불허한 문제의 가능성이 다분한 위험구간이었다. 오히려 더 조심하고 신경 쓰며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갈 시기였던 것이다.


효능이 있든 없든, 맛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론 노력해도 생각만큼 성과가 없을 때가 많다. 그땐 어쩌면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가혹하게 자신을 자책하기도 한다. 때론 노력도 안 한 채 단순히 운에 맡긴 채 요행을 바란 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든 어쩌든 결과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라고 그처럼 말하고 있다.


달리기를 하며 자신의 경험 사이클을 평생 유지하며 사는 것처럼 남들 보기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인생이란 뭔가를 시도했다는 노력만은 남는다는 것이다. 글을 쓰며 레이스를 계속하며 나이를 먹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인생이듯 우리의 인생도 그처럼 우리의 할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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