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후반이 되니 아이들도 성장해 각자 자리로 떠나고 부부만 생활하게 된다. 주말에 같이 가끔씩 여행도 다니고 같이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시기이지만 로망처럼 어디로 캠핑을 떠나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남편이 장거리 운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애들 어릴 때도 그랬지만 나이 들고서는 더더욱 피곤을 입에 달고 조금이라도 운전하면 힘들다고 온갖 엄살이다. 가끔 동네 작은 영화관이나 아이들 만나기 위해 인근 도시로 가서 같이 밥을 먹기도 하는 정도이다. 나이 든 부부가 오직 여행을 목적으로 매주여행 가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 같고 우리처럼 주중의 육체피로를 해소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가끔 아무 일정 없이 집에서 보내면 몸은 편하지만 이렇게 보내는 주말이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남편은 최근에 시골탁구클럽에 가입해 열심히 탁구를 치더니 단체전 우승을 통해 레벨이 올라갔다며 좋아했다. 반면 나는 운동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취미라고는 독서를 하고 책 내용 중 기억할 만한 내용은 만년필을 이용해 다이어리에 적는 것이다. 남편 몰래 만년필과 잉크를 구입하는 재미로 살고 있기에 따로 취미생활을 하는 것엔 불만이 없다. 또 남편이 가끔 슬쩍 내가 뭘 하는지 엿보기도 하지만 내가 얼마짜리 만년필을 사는지 내가 어떤 종류의 고급 다이어리 사는 데는 통 관심이 없어 그건 참 안심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방에서 혼자 필사를 하고 있을 때 뭔가 호기심을 가지고 뭐 해 하고 다가올 땐 첨엔 약간 두려움에 휩싸인다. " 지금 오리가 황금알을 낳고 있는데 누군가 본다면 제대로 된 알을 낳을 수 없다"는 핑계로 남편이 다가오면 필사를 급하게 중단한 게 사실 내가 그동안 구입한 만년필에 관심을 갖을까 봐였다. 다행히 만년필을 얼마 주고 샀는지는 모른다. 그건 나에게 길티 프레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인근 도시로 같이 갈 것을 제안을 했다. 운전 싫어하는 사람이 인근 도시 여행이라니 단번에 오케이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지역에서 열리는 탁구 개인전을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인근 도시에 가서 남편이 탁구 치는 동안 나는 근처에서 온천도 하고 카페투어하면서 커피도 마시며 시간 보내는 건데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집에서 안 읽어지는 책도 카페서 읽으면 잘 읽힐 거 아닌가. 그동안 사놓고 안 읽은 책 두 권을 잽싸게 챙기고 온천도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했다.
오래전에 아이들 어렸을 때 한번 갔던 온천인데 두 번째 방문이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그때 막 개업했을 때의 의리 번쩍한 느낌은 아니다. 노천탕에 있으니 실내보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더 가깝게 들린다. 모녀간에 친구 간에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50대 후반의 엄마와 20 대딸이 하는 소리를 우연히 엳듣게 되었다. " 엄청 좋다. 우리 나중에 일본 뱃부온천 가자. 이제 보니 저번에 엄마, 아빠 모임에서 일본 갔는데 그 집 남편 뭔 놈의 술을 누가 줬는가 많이 퍼먹어서 난리가 아니었어. 방에 들여보내면 또 기어 나오고... 참 환장할 노릇이었어. 근데 그 집 아들이 공부 잘한다고 그 자랑을 하더니 어디서 카페 한다는데,, 요즘 뭔 놈의 카페가 그리 많은지.."
온천에서 나와 카페가 문을 열 시간이 되어 인근에 최근에 지어진 듯한 카페로 갔다. 카페가 현대식으로 내부도 엄청 넓었지만 너무 매장이 넓은 까닭인지 냉기가 느껴졌고 마침 동시에 들어온 다른 일행이 2층으로 올라가서 나 혼자 있고 싶어 1층에 머물렀다. 필사를 하기 위해 책상 비슷한데 앉았는데 나무 의자 높이가 안 맞아 덜커덕거렸다. 몇 번 자리를 옮겼지만 안정된 곳은 없었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했는데 아침을 든든히 먹은 것 같지 않아 주스를 주문했다. 책을 봐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스벅의 조명이어야 책 읽기에 편한가 하고 카페를 한 시간 만에 나왔다.
시골임에도 크고 작은 카페가 많았다. 다시 인근 카페로 가서 또 커피를 주문할까 하다 코코넛 시그니쳐로 시작하는 걸 주문했는데 커피가 아니라 코코아 맛이 느껴졌다. 또 실패했다. 그렇게 그날 맛있는 커피는 마시지 못했다. 책을 펼쳤는데 통창이라 눈이 부시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 3시간 가까이 되자 남편이 문자가 왔다. 경기 탈락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행히 남편과 인근 식당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이런 식의 여행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남편에게 앞으로도 무조건 어느 지역에서든 개인전이 있으면 모조건 신청하라고 했다. 그러면 남편이 탁구칠 동안 나는 타지에서 카페투어도 하고 책도 읽고 나름 소소한 주말 여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 싫어하는 남편이 오로지 즐겁게 운전하며 갈 수 있고 나 역시 미니여행을 할 수 있고 서로에게 득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