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형태의 억압을 거부한다

"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에서 발견한 진실을 직시하다.

by 얼음마녀

‘ 30-50 클럽‘이라고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이상, 인구가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들을 ‘30-50 클럽‘국가라고 부르는데 지구 상에서 일곱 국가만이 이 그룹에 속해있다고 한다. 바로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한국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독일의 사회와 비교하여 우리가 정치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그 부분에는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사회, 문화, 경제, 교육 부분에선 아직도 고질적인 병폐가 왜 고쳐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1968년 5월 프랑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변혁의 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운동의 핵심적인 구호는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를 옥죄고 있는 유교적 윤리에 의한 억압,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직장으로부터, 여성에게 , 학생에게 가해진 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꼭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우리를 통제하는 사회적 시선도 억압이라고 한다. 이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격적인 시초가 베트남 전쟁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을 전 세계적으로 보면서 이 전쟁은 부당하다고 다 느끼고 파병을 하지 않았지만 유독 우리나라만 박정희가 1964년부터 68년까지 5년 동안 32만 명의 지상군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가 당시 군부 내에서 남로당 활동을 했기에 그의 사상을 의심한 미국에 좌익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미국에 그렇게 우호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에 파병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1968년부터 한반도가 게릴라전 상태로 접어들면서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남한 사회를 ‘병영 사회‘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예비군 훈련, 국민교육헌장, 군사교육, 파시즘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고 전 세계가 68 운동으로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외칠 때 박정희는 그런 식으로 남한사회를 군부 사회, 집단주의와 권위주의로 우리를 불구화시켰던 것이다.


우리는 그게 잘못된 것이 아닌 것도 몰랐기에 정치적 민주주의를 몸을 바쳐 쟁취했지만 그 외 사회, 문화, 경제 분야에서는 헬조선 소리가 나올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 성적 위주의 서열주의 사회로 만들면서 우리를 그렇게 불행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권위주의와 파시즘으로 얼룩진 과거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내 안에 파시즘이 있다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숙제를 안 해오고 성적이 떨어지면 당연히 학교와 가정에서 체벌을 당하는걸 당연하게 생각해오지 않았는가.


저자가 말한 데로 68 운동으로 자유와 변혁, 인간 존엄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던 시기 누가 그렇게 애써 우리의 변화를 막았는지 알게되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는 삶이 힘들어야 밥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과주의, 서열주의 직장의 경쟁구도에서 내가 왜 밀리는지도 모르고 낮은 서열을 자신의 무능력함으로 돌려야 했다. 성과 판단의 기준이 제대로 된 건지 모르지만 밀렸을 때 무기력한 좌절 감속에서도 악착같이 버티어야 했다. 우리를 몹시도 불편하게 하는 갑질, 꼰대 문화의 그 뿌리를 짐작하게 되었다. 조직에서 조금 자리가 올라가면 밑의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호통치고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는 생각이 공무원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상사가 명령하는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다고 괴롭히는데 그 명령하는 일들이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일도 많다. 그것이 업무 때문인지 업무를 빙자한 화풀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피해자를 보는 시각에도 많은 온도차가 있다. ‘정말 뭘 잘못해서 그렇게 당하는 거 아냐 ‘ 오히려 당하는 사람이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피해당하고 하소연 하고 보면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걸 알게된다. 그래서 대놓고 어디에 제대로 하소연도 할수 없는게 우리 조직사회의 현실이다그렇게 우리는 인권감수성과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사회에 아무 대책 없이 내던져진 상태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업무도 업무거니와 상대의 무례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상사니깐 끽소리 반론도 제기하지 못한 채 밥벌이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그 모든 걸 감내하고 스트레스를 겪으며 살고 있는 게 나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현실 아닐까.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치에만 국한된다고 오인하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정치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라고 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 약자와 공감하고 연대하며 불의에 분노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직 내 갑질도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이다. 조직에선 갑질 하고 마치 우리나라 정치가 썩었다고 옳은 소리를 하는 척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두 명 이겠는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자치인데 민주주의 시민 외치면서도 과연 우리의 직장이 민주적인가. 직장에서도 구성원의 자치보다는 어떤 문제에 대해 비판을 하면 찍히는 분위기 인지라 평탄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개인의 의견이나 비판애는 자는 찍히기 쉽상이다.


니 잘못이 아니야!


내가 당하는 억압이 잘못된 것이기에 그걸 바꿔야 하는데 바꿀 수 없기에 내가 느낀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고 다른 의견을 내놓거나 비판을 하는 사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점차 길들여지고 체화하면서 어쩌면 내 잘못인지도 모른다는 감정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었다. 김누리 교수는 그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고 니 잘못이 아니라 그건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 특이한 역사구조를 가진 대한민국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타인에 대한 무례함과 갑질이 판치는 사회, 살인적인 경쟁구도로 아이들을 몰아가는 대학입시 제도를 비롯해 사회, 문화, 경제 전반에 걸친 우리가 악착같이 자신을 착취하며 살아왔고 아프니깐 청춘이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단식의 구호가 난무하는 그 모든 것들이 철저히 잘못되었음을 저자는 독일의 사례와 비교하며 얼마나 우리가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지 하나하나 일깨워준다.

113p-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옳다면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우리 교육은 자아를 강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하게 만드는 교육이었습니다. 늘 학생을 야단치고 벌주고, 결국 깊은 열등감을 갖게 하는 방식이었지요. 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고, 심지어 학생들의 인격은 아랑곳없이 전교생의 석차를 게시판에 붙여놓기도 한다. 이것은 명백한 인권침해입니다. 초. 중등 교육기관에서부터 아이들의 인권을 훼손하고 유린한 것입니다. 한국의 아이들은 이런 학교에 다니면서 모멸감과 자괴감, 열등감을 일상적으로 느끼고 내면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이런 학교에서 강한 자아를 가진 아이들이 자라날 수 있을까요? 한국인들의 자아가 약한 것은 자아를 유린하고 파괴하는 교육 때문입니다.


121p-우리가 한국에서 배운 교육은 사실 반교육(anti-education)에가깝습니다.


95p-한국인으로서 우리들이 받은 교육은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군사문화의 잔재가 깊게 배어있는 교육이었고, 인권을 경시하고 끊임없는 경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반교육‘에 가까웠지요. 이런 반교육, 파쇼 교육의 잔재가 지금도 우리 내면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내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억압의 문화, 부조리의 상황을 하나의 문제로서 인식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물의 질서‘, ‘세상의 이지‘, ‘자연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정상성의 병리성‘이었던 것입니다.


17p-저는 독일 사회를 보면서 서서히 우리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살인적인 경쟁과 승자독식의 정글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지요. 우리의 삶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 우리 머릿속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것들이 혹시 비정상이 아닌가 ‘라는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된 것이지요.


34p-한국인들은 정치의 광장에서는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자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만, 일상의 공간에서는 공개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깁니다.


100p-20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극작가라고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한 유명한 말로 시작해 보지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독을 택한 그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


108p-이제 68 혁명의 부재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시대착오적인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는 시대에 상당히 뒤떨어진 현상들이 참 많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인권 감수성의 부재입니다. 한국 사회는 인권 감수성이 대단히 모자라는 사회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정말 부족합니다. 특히 난민이나 장애인, 문화적. 성적 소수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결국 68 혁명이 없는 한국의 상황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한국사회가 권위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이 권위주의 문제가 독일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저자 내 독일에서 유학했고 연구했기에 독일의 통일, 베를린 장벽 이야기, 독일인의 의식, 교육 그 모든 문제를 우리와 비교를 하면서 정말 너무도 보잘것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고 한다. 조직 내 권위주의를 비롯해, 학교에서 벌어지는 살인적인 경쟁은 승자독식의 논리와 연결되어 나치즘 같은 야만을 야기한다. 68년도에 이미 과거 나치즘에 대한 혐오 및 두 번 다시 그 짓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으로 사회의 변혁을 추진했다. 1970년대 독일 교육개혁의 기본원리인 '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구호로 그들은 68 운동부터 시작해서 점차 국립이 대부분인 대학의 학비를 없앴다고 한다.


131p-저는 이런 이유로 자기 착취를 조장하고 장려하고 미화하는 일체의 담론에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라는 식의 말들을 들으면 화부터 나지요. 한국에서 사는 이 고단한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좀 더 ‘착취하라고 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26p-한참 독일에 있다가 한국에 가면 한국 사람들의 표정이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강한 긴장감이 표정에 배어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다시 독일에 가면 서독 사람들의 얼굴에서 평온함을 느꼈지요.


유교주의에 바탕을 둔 온갖 종류의 억압이 우리가 거친 인생을 사는데 당연하다고 이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기 착취, 내 안의 노예상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린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억압을 반대해야 한다. 자유인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이 상태를 인지하는 것이라 한다. 애써 우리를 혹사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 인간이 존엄받는 사회, 청소년 자살이나 이탈이 없게, 공부 못해도 인간대접을 받을수 있는 사회, 직장에서 뭔 자리하나 꿰찬다고 부하직원들한테 갑질 안 하는 사회가 되게 만들어야 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어찌 됐건 헬조선이라고 불리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는건 지금 우리의식이 뿌리채 흔들리는 고통을 겪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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