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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vi Apr 20. 2022

은행의 자정은 당신의 정오보다 아름답다

[계정계 금융IT기초 - 공통용어#5] 일자전환

(본 내용은 금융 IT에 새로이 입문하려는 친구들을 위한 글로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끔,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과장으로 점철된 글입니다. 현실의 History와 아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키위은행 황 주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망의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탓이다.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냐, 그녀가 애정하는 그 남자들의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림픽체조 경기장 단독 콘서트. 그 마지막 취소표 티켓팅 시간이 바로 목전이었다.


 지난 5년 동안 팬심으로 함께해온 나날들이 황 주임의 눈앞을 주마등처럼 수놓았다. 대학교 2학년 때, 동기의 플레이리스트를 같이 듣다가 빠져버린 그 순간의 생생한 기억부터 첫 콘서트 직관, 감격의 팬사인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청춘은 이들과 함께였고, 이들의 청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행히도 주축 멤버들이 입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어버린 탓에, 이들이 완전체로 활동하는 것은 이번이 아니면 내후년을 기약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이 야밤에 핸드폰과 마우스를 동시에 붙잡고 눈을 치뜬 채 있는 이유였다.

 이미 사전 예매와 본 예매는 매진. 간절함이 모자랐던 탓일까, 앞선 두 번의 시기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표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티켓 판매 대행사 'NO24' 에서 취소표가 일괄로 판매되는 것은 자정. 소위 말하는 '취켓팅'의 시간이다.

 예매 어플을 켜둔 채 스마트폰을 쥔 황 주임의 손이 축축해졌지만, 그녀는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땀은 나중에라도 닦을 수 있지만, 표를 놓치면 2년간의 기다림은 더없이 공허해진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황 주임의 입도 타들어갔다.

 열어 둔 서버 시간 타이머의 숫자가 00:00:00을 가리키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메뉴를 열어젖히고 드문드문 떠 있는 좌석을 번개같이 낚아채고 있었다. 제발, 제발, 되뇌이는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예매자의 정보를 입력하고, 결제 수단을 지정하는 팝업이 툭 나타났다. 거의 다 왔어! 그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시뮬레이션 했던 대로 능숙하게 기 등록해 둔 카드와 인증번호를 입력한다.

 잠깐, 문득 그녀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모종의 느낌이 흘렀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잠깐의 망설임이 어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가는 지난 두 번의 실패로 몸소 체험했거든.


 거의 끝났다.

 마지막 확인 버튼을 누르고, 결제가 진행중이라는 메시지까지 확인한 그녀는 튀어나오려는 환희를 참지 못하고 실웃음을 흘렸다. 이걸로 된 거야. 2년의 기다림은 길겠지만, 마지막 추억은 함께할 수 있어.

 그러나 흐려져가는 황 주임의 시야 사이로 불쑥, 예고없이 내밀어진 팝업은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창과는 궤를 달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은행별 점검 시간입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23:50 ~ 00:10)


 상기한 안타까운 사연은 생각보다 꽤 자주,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편이다. 사실, 은행 전산이나 금융 IT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지인으로부터 '대체 너네는 밤중에 뭘 하길래 매일 점검을 한다는 거야?'라는 볼멘소리 섞인 질문을 받아봤을 법 하다.

 하지만 퍽 설명하기가 난감한 것이, 매일 자정, 대한민국의 실물 경제를 잠재우는 그 고요하고 은밀한 단잠이, 은행 시스템에서 가장 난해하고 섬세한 것임을 어찌 설명하면 좋다는 말인가.



 매일 00시,
어제와 오늘, 내일의 의미가 바뀌는 그 순간,
은행의 가장 위대하고 거대한 프로세스가 시작된다.


 첫 번째,
 자정,

 날짜가 변하는 바로 그 시각, 일자전환 배치가 실행되고,
 일자전환 배치는 다음의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한다.

1.    은행 전산 시스템 내부의 달력을 모두 한 장씩 넘기고,
2.    1년 뒤의 오늘이 '영업일'인지 '휴일'인지 예상해서 캘린더를 그린 다음에,
3.    은행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게 '어제가 끝났습니다!!' 라고 소리친다.


 금융 도메인에서 '일자'라는 말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자' 때문이다.

 은행이 취급하는 모든 기록된 잔액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자가 발생한다. 당장 우리가 맡긴 예적금부터 시작해서 환, 어음, 채권, 심지어 금고에 보관 중인 금이나 현금도 매일, 혹은 매월 이자를 산출하여 기록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자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이전 일자(회차)까지의 확정된 잔액이 필요할 것이고, 이에 가산하거나 차감할 비율을 의미하는 금리가 필요할 터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다음 절차가 뒤이어 실행된다.

 

 두 번째,
 전일자까지 계정에 쌓여 있는 잔액을 확정하기 위한 배치가 일자전환 배치의 직후에 기동된다.


 이렇게 일자전환 배치가 종료되고 전일자의 잔액이 확정된 순간을 '회계일자가 종료되었다'고 표현한다.

 즉, 지금 이 시점부터 은행에서 발생하는 모든 거래는 절대 어제의 날짜로서 회계될 수 없다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업무 담당자들 입장에선, 마음 놓고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고마운 배치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확정된 잔액에 금리를 곱하여 산출한 뒤, 이런저런 계산을 거치면 단편적이나마 은행에서 전일자의 영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이를 은행의 포괄손익이라고 일컫는다.


 전일자 잔액을 확정하고, 이자를 산출하는 것은 은행의 모든 계정에 해당되는 절차이다.

 대충, 아무리 작은 은행이라도 수천 개 쯤의 계정이 있기 마련인데, 따라서, 당연히 산출된 포괄손익에는 은행이 수취해야 하는 수익도, 고객에게 지급해야하는 비용도 섞여 있다.

 이를 분리하여 은행이 먹어야 할 돈과, 고객에게 분배 지급해야 할 금액을 나누는 작업을 결산이라고 부른다.


 은행의 자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일자 총계정 확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번째 큼지막한 배치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세 번째,
 전일자의 확정된 잔액과, 해당 계정을 손댄 업무팀의 기록을 모아서 비교, 대조한다.

 이를 잔액대사라고 일컫는다.


 입/지가 발생하는 은행의 모든 거래는 예외 없이 최소 두 개의 내역을 DB에 적재하게 된다.

 하나는 회계/계리팀의 계정처리 모듈을 호출한 순간 적재되는 총계정 일계내역,

 다른 하나는 해당 계정처리에 대한 업무적인 Ownership을 가진 업무팀의 거래내역이다.


 가령, 고객이 은행에 찾아와서 본인 통장을 내밀며 십만원의 정액 자기앞수표 발행을 요청한다고 하자.

 추후 자세히 다루겠지만, 수표는 예금의 또 다른 형태이며, 수표 종이쪼가리는 '내가 이 은행에 이만큼 저금했어요'라는 증표에 불과하다. 우리가 만드는 통장도 보통예금, 일반예금, 정기예금이 있듯이 수표를 관장하는 예금을 별단예금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은행에서 별단예금계정은 수표의 지급과 발행 뿐만 아니라 훨씬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아무튼, 별단예금도 예금은 예금이고,

 예금은 은행이 고객에게 빚진 채무이므로 부채의 증가라서 대변(우)에 기입.

 별단의 상대계정은 고객의 예금에서 출금이 발생했으므로, 부채의 감소라서 차변(좌)에 기입.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분개가 성립한다.



 따라서, 위와 같은 분개장을 보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하나의 거래에서 2건의 일계 개별부가 발생했고, 2개의 계정과목이 관여하였다.

 고객예금과 별단예금을 관리하는 거래내역이 서로 다른 테이블이라면, 3개의 테이블에 내역이 쌓였을 것임도 예상이 가능하다. (총계정원장 거래내역, 별단예금 거래내역, 고객예금 거래내역)


 만약, 위와 같은 거래가 전일자에 150건 발생했다면, (그 이외에는 거래가 없었다고 가정하고)

 전일에 고객예금 계정에서는 총 15,000,000원의 출금이 발생하여 그만큼 잔액이 줄었을 것이고,

 별단예금 계정에서는 총 15,000,000원의 입금이 발생하여 그만큼 잔액이 늘었을 것이다.

 이 모든 잔액의 변동은 총계정원장과 별단예금 거래내역, 고객예금 거래내역에서 단 1원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일치하도록 기록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잔액대사의 원칙이자 자정의 은행별 점검시간을 뜨겁게 수놓는 가장 주된 Task 중 하나이다.


 네 번째,
 확정된 잔액과 완료된 잔액대사를 기반으로 오만가지 센터컷이 실행된다.


 센터컷이란 입금 및 지급, 계정처리가 수반되는 배치를 의미한다. 파일을 읽어서 수십, 수백명 분의 계좌에 자금을 이체하는 펌뱅킹이나 급여이체 등, 뭔가 손으로 하기 너무 많을텐데? 싶은 녀석들은 다 센터컷을 통해 기동되는 이체 프로세스이다.

 당연히 종류도 많고 복잡도도 높지만, 일자전환 직전/직후에 기동하는 센터컷은 특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은행에서 잔액이 움직이는 계정만 수천에 이르고 이 중에서는 분명 임시적인 명목이나 추적하기 힘든 흐름을 담고 있는 금액이 존재한다. 이러한 계정 중에서는 잔액을 확정하기 껄끄럽거나, 익일 별도 처리를 해야만 하는 금액, 익일에 무언가 은행이 원활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잔액이 확정된 후, 어디론가 옮겨 둬야 하는 계정 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처리를 위해 계정과 계정 간, 자금을 옮기는 센터컷들이 기동되고, 한참을 또 떠들썩하게 점검 시간을 장식한다.


 다섯 번째,
 기타 날짜가 바뀌자마자 수행되어야 하는 부지런한 배치들을 기동한다.


 특정 기일이 경과하면 칼같이 데이터를 날려줘야 하는 배치라던지, 업무 개시 전에 무언가를 해 두어야 하는 배치 등이 이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은행과 24시간 제휴된 대외 기관들의 온라인 업무 개시 시점이 00시 15분 즈음이므로, 대외 기관과 셔터를 올리기 직전에 무언가를 해 두어야만 한다면, 바로 이 시점 뿐이다.



 이외에도 매일매일의 일자 전환에 수반되는 많은 프로세스들이 있지만, 큰 줄기는 위와 같이 다섯 갈래로 분류할 수 있을 법하다.


 결국 황 주임은 사랑하는 그 남자들과 2년간의 이별을 추억 없이 쓸쓸하게 지새우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은행업에 종사하면서도 점검 시간을 인지하지 못했던 안일함의 대가로서 성장의 밑거름 삼는다면, 그런 경험도 나쁘진 않잖아?

 물론, 나는 은행 점검 시간이면 당연히 핸드폰 결제를 먼저 시도하겠다.



은행 점검 시간이면 개발자들이 막, 새벽에 출근하고 그러는 거예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계정계 전체의 시스템을 갈아엎은 대규모 프로젝트가 오픈하는 날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어느 정도 안정화된 시스템이라면 은행 점검 시간에 개발자들도 집에서 잔다.


 하필 자정의 일자가 넘어가는 그 순간에, 은행 서버실이나 데이터센터로 벼락이 떨어져서 일자전환이 백 투더 퓨처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은행 점검 시간에 발생하는 대다수의 이슈는 아침에 출근하고도 어느 정도 수습이 가능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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