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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an 03. 2023

설거지는 싫지만 칭찬은 좋아서

칭찬은 미래도 춤추게 한다

"야아는 그릇을 희한하게 잘 쌓는다잉."

툴툴거리며 설거지를 마치고 생각지도 못하게 날아든 엄마의 칭찬이 어찌나 좋던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기분이 좋을 때면 흘러나오는 엄마 특유의 콧소리와 억양까지 전부 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바깥일을 하면서 집안일도 완벽하게 해내는 미디어 속 말도 안 되는 엄마는, 우리 엄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거실은 어딘가 어수선했고, 부엌은 뭔가 휑했다. 엄마가 고픈건지 배가 고픈건지 몰라, 헛헛할 때마다 라면을 끓여먹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그래도 식구들의 끼니는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엄마의 노력 덕분에 저녁만큼은 늘 잘 차려진 밥상에 둘러앉았지만, 저녁상을 치우기도 전에 엄마는 지쳐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는 종종 설거지를 자원했다. 나는 설거지가 싫다. 아니, 일이라면 다 싫다. 하지만 생색은 내고 싶다. 생색을 내려면 일을 해야 한다. 생색을 내기 위해 일을 하는 삶, 어쩌면 이렇게 캐릭터에 변화가 없는지. 그러니까 그때도 설거지가 좋아서 팔을 걷어붙였을 리는 없다. 다만 엄마의 은근한 바람을 외면하지 못한 나의 눈치와 인정욕구가 결합한 결과였겠지. 


엄마는 내게 많이 고마워했다. 잔뜩 피곤에 절어있던 얼굴에 화아 웃음이 퍼져 나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 나도 좋았다. 쟈아는 그릇을 희한하게 잘 쌓는다고, 차곡차곡 예쁘게도 쌓는다고, 엄마의 칭찬까지 보태지면 마음이 뿌듯함으로 가득 차서 굳이 모양 빠지게 생색을 낼 필요도 없었다. 설거지를 마쳐갈 때쯤이면 조금이나마 기력을 충전한 엄마가 이제 그만 하고 가서 TV나 보라며 나를 떠민다. 그러면 나는 머쓱한 마음 반, 뿌듯한 마음 반으로 마지못해 기쁘게 바지에 손을 닦으며 거실로 가서 TV나 보면 되었다.


그날따라 엄마는 유독 피곤해 보였다. 엄마의 고객 중에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가령 이미 뜯어서 먹은 상품을 환불해달라든가, 본인의 백화점 나들이에 기사 노릇을 해달라든가 따위의 진상질을 진상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진상들이 갖자기 방식으로 엄마의 세계를 들락거렸겠지.


"오늘은 내가 설거지할게."

"그럴래."

평소 같았으면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곁에서 상을 정리하며 말벗이 되어주었을 엄마가 그날은 훌쩍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의아했고 많이 심심했지만, 기뻐할 엄마를 떠올리며 차곡차곡 그릇을 쌓았다. 참 가지런하게 예쁘게도 쌓았다. 설거지를 다 마칠 때까지도 엄마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쌓아놓은 그릇을 보고 이번엔 얼마나 감탄을 쏟아낼까, 잠자코 거실에 앉아 엄마의 칭찬을 기다렸다.


"세상에, 이게 다 뭐냐."

방에서 나온 엄마가, 무언가를 쏟아내기는 했다. 감탄보다는 한탄에 가까웠지만.

"설거지를 할 거면 뒷정리까지 확실히 해야지. 음식물 쓰레기를 그대로 남겨놓고. 이래놓고 무슨 설거지를 한 거라고."


그동안은 설거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갸륵해서 어쩔 줄을 모르던 엄마가, 뒷정리는 엄마가 할테니 그만 가서 TV나 보라던 엄마가, 이제 와서 뒷정리를 안 했으니 설거지도 안 한거나 마찬가지라고 나를 꾸짖다니. 배신감과 억울함, 씁쓸함, 온갖 감정이 한 데 뒤엉켜 나는 대꾸할 말을 잃었다.

"여기, 니가 와서 해 놓은 꼴을 좀 봐라. 이게 뭐냐, 이게."

전의를 상실한 나를 기어이 엄마는 일으켜 세웠다. 차라리 다른 식구들처럼 늘어져서 TV나 봤더라면 듣지 않아도 됐을 타박을, 나는 왜 사서 고생 끝에 듣고 있단 말인가. 축축하게 젖은 소매 끝이 한심했다.


"그럼 앞으론 설거지고 뭐고 아예 안 할게! 어차피 내가 한 건 설거지도 아니라면서?"

"그래! 이렇게 할거면 차라리 하지 마라!"

섭섭했다. 섭섭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섭섭할 때 마음에 물기가 어린다면, 심장이 물을 잔뜩 빨아들인 스펀지가 된 것처럼 무겁고 저렸다.


그때부터 설거지가 끔찍하게 싫었다. 쌓여있는 빈그릇들을 보면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 말을 해놓고도 엄마는 종종 내게 저녁 설거지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고, 나는 그때마다 "언제는 설거지 하지 말라며?" 의미없는 대거리 끝에 마지못해 싱크대 앞에 섰지만 그릇을 모조리 깨부시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다스리며 설거지를 해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설거지가 싫다. 이제 설거지를 해도 생색을 낼 수 없는 처지라, 오히려 설거지를 안 하면 질타를 받을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해낼 뿐이다. 아무렇게나 설거지를 마치고 무심코 식기건조대를 보면, 어쩜 저렇게 잘 쌓았을까 스스로도 감탄이 나온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습관이란 이렇게나 무섭다.


2단짜리 한정된 공간에 식기구 각각의 무게와 부피, 모양새를 고려해 마치 테트리스처럼 딱 맞아떨어지게 쌓아올린 저 결과물을 보라. 설거지가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내 손은 "야아는 그릇을 희한하게 잘 쌓는다"던 엄마의 칭찬을, 그때의 환희를, 조금도 잊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유년기의 칭찬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릇을 희한하게 잘 쌓는다던 엄마의 칭찬에 붕 떠올랐다가, 이렇게 할 거면 차라리 하지 말라던 엄마의 타박에 오래도록 가라앉았던, 열한 살짜리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태 차곡차곡 그릇을 쌓으며 뿌듯해하는 서른 일곱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그날 엄마의 애먼 짜증과 몹쓸 피로를 이해한다. 그저 먹고 사는 일이 웬수다. 엄마에 비하면 한참 어설프게 살림을 사는 나를 보면서도 한없이 애잔해하며, "크면 어차피 해야 될 거, 커서 이렇게 잘 할 거, 뭐하러 미리부터 시켰는지 모르겠다"는 엄마의 후회도 진심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엄마의 사랑만은 의심치 않는다. 엄마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와는 별개로 내 아이들을 보며 다짐한다. 


많이 쓰다듬어 줄 일이라고.

아낌없이 기특해할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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