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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Aug 31. 2020

엄마도 내 나이에 나를 길렀지

엄마의 둘째는 마음처럼 빨리 자라지 않았다

내가 세 살 때 엄마는 일을 나갔다.

선교원에서 나는 가장 어린 아이였다.

그나마 3월생이라 두돌을 꽉 채운 세 살이었던 게 엄마 마음에 위안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세 살, 선교원에서 맞은 첫 여름


그렇게 징징대더라고 했다.


날 때부터 두 돌이 되도록 좀처럼 우는 일이 없이 먹고 놀고 자기만 했다던 엄마의 둘째는 엄마가 일을 나가던 세 살 무렵부터 돌변했다. 까딱하면 울고, 한번 울었다 하면 그칠 줄을 모르고, 울면서 말을 하고, 엄마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아주 사람 피를 말렸다"고 한다.


오죽하면 교회이모가 나를 흘기며 "쟤는 맨날 울어!" 퉁을 주었다가 "아영 씨는 우리 딸래미가 미운갑서~나는 그래도 우리 딸이라 이쁜디." 하는 엄마의 대답에 그렇게 미안하더라는 얘기를, 수십년 후에 당사자 교회이모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래봐야 교회에서 잠깐 스칠 뿐인 남의 집 엄마가 눈을 흘겼을 정도면, 피를 말리는 정도가 상당했지 싶다.


남처럼 눈을 흘길 수도 무작정 안아 달랠 수도 없는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 껌딱지


다서여섯살 때부터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종종 있었다.


오빠와 나는 나이로는 세 살 차이지만 학년으로는 두 학년 차이가 난다. 당시 초등학교 1-2학년이었던 오빠가 태권도학원에 가면서 <미래소년 코난>을  틀어주고 가면, 대여섯살의 나는 비디오가 다 돌아갈 때까지 티비 앞에 앉아있었다. 보통은 <미래소년 코난>이 끝나기 전에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만 그날은 오빠가 돌아오기도 전에 비디오가 끝나버렸다. 바닷가를 질주하던 코난은 사라지고 화면엔 뜻 모를 하얀 글씨만 깜빡깜빡하는데 더럭 겁이 나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섰다.


겨울이었다. 잠바는 걸치고 나갔던가. 총총 뛰어가느라 손이 시린 것도 몰랐다. 태권도장 앞에 도착했지만 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너무 커 보여 들어가지 못하고 얼씬얼씬 저 안에 우리 오빠가 있나 없나 훔쳐보는데 제일 두껍고 큰 아저씨가 불쑥 나왔다. 아마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을 게다. 고개를 저었더니 오빠가 나왔다. 오빠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뿌리치고 뒷걸음질쳤다. 태권도장 문 앞에 서서 오빠를 기다렸다. 지금은 남 같은 오누이지만 그 순간에는 비빌 언덕이 오빠밖에 없었다.


나를 딱히 귀찮아하지도, 살뜰히 챙기지도 않았던 오빠


그렇게 오빠랑 집에 돌아갔더니 아빠가 와 계셨다. 애가 손이 꽁꽁 얼도록 밖에서 기다리게 뒀다고 아빠는 애꿎은 오빠를 나무랐다. 미안했다. 오빠한테 너무 미안했다. 여섯살에게도 염치라는 게 있어서 그 때의 미안함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한 애가 어떻게 집에 혼자 있었나 싶은데 꽤 익숙하게 잘 했던가 보다.


한번은 엄마가 오빠와 치과에 다녀온다며 둘만 집을 나섰다. 어쩌나 보려고 그랬는지, 여차하면 진짜 둘이 갈 생각이었는지, 반반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간이 크다. 당연히 난 문이 닫히자마자 4층짜리 아파트가 떠나가게 울어댔고 엄마는 다시 돌아와서 나와 오빠를 데리고 나섰다.


버스를 탔다. 사람이 많았다. 우리가 내려야 하는 중앙시장까지도 사람이 빽빽했다. 작은 아이 시선으로 올려다봤기 때문인지 지금도 그만큼 사람이 많이 탄 버스를 본 기억이 없다. 엄마는 부자(그땐 하차벨을 부자buzzer라고 했다)를 누르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택아, 내렷!"


엄마의 외침은 사람들 속에 묻혀 사라졌고 엄마와 내가 내리자마자 버스는 휑하니 오빠를 태우고 가버렸다. 황망함이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황망함을 느꼈다. 아들 실어 보낸 엄마는 오죽했을까. 엄마는 굉장히 침착한 사람이다. 당황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사기꾼업자와 싸울 때도 아주 명료한 발음으로 차분하게 "야. 이, 개자식아."라고 하는 걸 옆에서 들었다. 그 엄마가 그때는 하얗게 질렸다.


"가시나가 집에 있으라니까 씰데없이 따라와 가지고!!!"

뭔가 억울했지만 그냥 내가 잘못한 걸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다시 버스를 타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따라간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고 오도카니 문 앞에 앉아있다가 퍼뜩 방으로 가 오빠사진을 찾았다. 오빠사진을 꺼내놓고 엉엉 울었다. 집에서 그거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울다 잠들지 않았을까. 엄마가 오빠와 함께 들어왔다. 버스종점까지 가니 저만치서 오빠가 걸어오더라고 했다. 종점 근처에 오락실이 있어 구경하다 이제 막 나왔다고 하더란다. 새끼들을 모두 데리고 몇 시간만에 앉아보는지, 방바닥에 앉아 내가 꺼내놓은 오빠사진을 물끄러미 보던 엄마의 얼굴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내가 세살 때 엄마는 일을 나갔다.

다서여섯살 무렵부터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내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오빠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다.


엄마는 일을 나가야 했다. 그건 꼭 돈 때문이라기 보다 엄마의 신념이었다.

엄마는 기댈 곳이 없었다. 친정부모님도 시부모님도 남편도 각자의 일로 바빴다.

엄마는 운전면허도 자동차도 없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러 가면서도 버스를 탔다.


엄마에겐 아이가 둘이었다. 그 중 둘째는 마음처럼 빨리 자라지 않았다.

지난 일을 잘 곱씹지 않는 엄마가 딱 한 번 나에게 후회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너를 놓고 나가지 말 걸. 그리 어린 것을. 그래서 애기가 그렇게 울었나 싶다."


나는 괜찮았다.

크면서 순간순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하나도 서럽지 않고 웃음이 났다. 아마도 좋았던 시간들 또한 일상의 사이사이 스며들어 어린 시절의 한 폭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나를 길러준 엄마에게

서른줄의 꽃 같이 곱던 엄마에게

나는 괜찮았다고,

정말 애쓰셨다고,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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