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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Aug 19. 2020

국회의원 안 하길 참 잘했다

"내가 국회의원을 했으면 어쩔 뻔 했냐."


난데없는 전화.

느닷없는 멘트.

참으로 아버지다웠다.

아니, 아버지답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엄마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짐작할 뿐, 직접적으로 묻는 법이 없다.

단언컨대, 그건 다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를 앞에 두고 '아빠'라는 호칭을 시도할라치면 식도에서부터 닭살이 올라온다.

내가 스스럼없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은 나의 아버지가 아닌 내 아이들의 아빠다.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라고밖에 못 부르는 것, 그것 역시 다 아버지 때문이다.


없는 집 둘째아들로 태어나 집안의 궂은 일을 도맡아했던 아버지. 일로 잔뼈가 굵은 아버지는 성인이 되자마자 각종 중장비 자격증을 취득해 거친 현장으로 나갔다. 현장에서 최고의 일꾼이었던 아버지는 집안에선 최고의 폭군이었다. 다른 가족들의 배려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본인은 말 한마디에도 배려를 싣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의 배려심 없는 말들에 얻어맞아가면서도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곤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첫 등교날, 밥상에서 괜한 투정을 부려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난 5학년 되기 싫어. 4학년 때가 좋았는데."

학교를 안 가겠다는 말도 아니었고, 5학년이 되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늘 과하게 긴장했던 나는 그저 '괜찮다'는 격려의 말 한마디를 원했다.

"그믄 니는 계속 4학년이나 해. 영원히 뒤처져서 그렇게 살어."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듯, 경멸의 표정으로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입을 다물고 씹던 밥만 꼭꼭 씹었다.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충분히 공부를 했음에도 시험이 자신없다고 눈물을 글썽거린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였다. 엄마아빠, 날 좀 위로해줘, 다독여줘, 격려해줘, 다 잘 될 거라고 말해줘.

"밥맛 떨어지게 밥상에서 처 울고 그러면 아침부터 뭔 일이 되겄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 뒤로 아버지 앞에선 투정의 'ㅌ'자도 꺼내놓지 않았다. 차라리 무생물인 베개를 끌어안는 편이 훨씬 위로가 될 것이기에. 아버지에게는 위로부적격자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남을 위로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기대를 접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실망할 일이 생겼다. 첫 수능시험을 마치고 재수가 결정지어졌을 때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들이 딸 대학 어디 갔냐고 물어봐쌌는디 쪽팔려서 내가 진짜."

집을 떠나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기로 한 건 나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만약 집에서 재수를 했더라면 당시 아버지의 막말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공모전을 준비할 때도 넘기기 어려웠던)A4용지 40매 정도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어찌어찌 대학에는 들어갔지만 한동안 재수로 인한 상처가 가시지 않았다. 그 시절을 건드리면 마음이 아팠다. 첫 학기를 마치고 고향집에 내려왔다. 아버지는 티비만 켰다 하면 바닥에 붙은 채로 이걸 가져와라 저걸 가져와라 요구사항이 많았다. 그날따라 날이 더웠다. 슬 짜증이 밀려왔다.

"아따 좀 한번에 시키씨요!"

"그러는 니는 왜 (대학을) 한번에 못 갔냐."

생각도 못한 아버지의 재수공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멍해졌다. 잠자코 아버지가 요구한 물건을 아버지 옆에 갖다놓고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한번 더 접었다. A4용지는 최대 일곱번까지 접을 수 있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접어야 더 이상 접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질까?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더 이상 아버지에게 어떤 정서적인 돌봄도 기대하지 않게 되자 아버지가 내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딸, 잘 지내냐."

"아빠 안 보고 싶냐."

"(별안간 성대모사를 하며)안녕하세요, 배철숩니다. 정말 똑같죠?"

아버지, 왜 이래요. 하던 대로 해요.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요.

전혀 마음에 없는 상대가 자꾸 보내오는 카톡처럼 아버지의 연락이 질척질척하게 느껴졌다. 끈질긴 아버지의 구애에 나는 한결같이 냉담하게 반응했다. 가끔 죄책감이 들다가도 아버지를 불편해하는 마음이 늘 이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바로 결혼을 했다. 재수비용, 대학비용, 결혼비용, 근 5년 동안 내 밑으로 끊임없이 돈이 들어갔다. 정서적인 지원은 전무했지만 물질적인 지원은 아낌없이 해주었던 아버지. 아버지를 불편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상당 부분 부채감이었다. 아버지의 돈을 받아쓰면서 아버지를 불편해해도 되는걸까?


결혼을 한 뒤 나는 아버지로부터의 해방감을 무척 크게 느꼈다. 홀가분했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가 일군 집과 재산을 소비하지 않는다. 결혼을 한 나와 아버지 사이엔 어떤 유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내가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


아버지는 내가 낳은 아이를 몹시 사랑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아버지는 아이에게 살아있는 테마파크였다. 그야말로 익사이팅 할아버지. 넘치는 힘도 힘이지만 안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힘도 실로 대단했다. 당신 스스로도 어디서 이런 사랑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놀라워할 정도였다. 내 자식 키울 때는 왜 이렇게 못해줬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는 말도 종종 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가 우리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말을 하다니. 엄마와 나는 별일이라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영상통화를 걸어오던 아버지가 전화를 걸자마자 아이들을 제쳐두고 나를 찾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야, 얘들아, 엄마 좀 바꿔봐라. 엄마 어딨냐."

"왜요, 아버지."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전화기 앞으로 쫓아갔다.

"야야 날필아."

"예."

"내가 국회의원을 안 하길 참 잘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되묻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라. 내가 국회의원 한다고 나섰으면 어? 얼마나 나를 탈탈 털어가지고(판사님,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털다가 털다가 털 게 없으면 자식들까지 털어가지고. 니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어? 수석장학금 받고, 복수전공하면서 조기졸업하고, 그런 것까지 싹 다 들춰내서 비리니 뭐니 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아부지는 지금, 자랑중이었다. 내 딸이 수석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다녔으며 복수전공을 하면서도 조기졸업까지 해냈다고(나도 지금 자랑중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신종 자랑수법이란 말인가. 딸에게 딸자랑을 이렇게까지 돌려서 할 일인가.


왜 대학을 한번에 못 들어갔느냐고 비수를 꽂을 땐 언제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조차 아버지가 바라던 대학이 아니었음에도, 아버지는 어떻게든 자랑거리를 찾아내어 여태 훈장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러고보면 아버지가 이제껏 보여준 적 없던 사랑을 내 아이에게 모조리 쏟아부을 수 있는 것도 그 아이가 내가 낳은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아부지, 내가 그렇게 좋았어요?


어쩐지 발바닥이 근질거렸다.

"잉 국회의원 안 하길 참 잘했네. 아부지 땜시 나가 겁나게 욕볼 뻔 했네. 아따 아부지 참 잘 했소."

한동안 쓸 일이 없었던 고향 사투리가 걸쭉하게 쏟아져나왔다.


아버지와 나는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

엄마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짐작할 뿐, 직접적으로 묻는 법이 없었다.

고백건대, 그건 비단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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