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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Oct 15. 2020

자수를 해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나의 첫 차사고

"아니 그냥 가셨어도 될 걸....이렇게 자수를 해버리시면...하참.."

나와 내 차와 학교울타리를 번갈아 살피던 두 경찰관이 서로 황당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엄마아 도서관은 언제 들어가는데에!"

벌써 30분도 넘게 도서관 주변만 배회하느라 약이 오를대로 오른 아이들은 슬슬 패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지나가던 행인들마저 멈춰섰다.

"뭔 일 났어요? 신고 들어왔어요?"

"이 분이 본인을 신고하셨어요."

"예? 아니 왜요?"

"운전 중에 학교울타리를 훼손하셨다고요."

"아이고...거 애기엄마가 융통성이 너무 없네...이런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행인이면 행인답게 가던 길이나 갈 일이지 눈치도 없이 주섬주섬 전도지를 꺼내드는 두 아주머니의 포교멘트까지 보태져 그야말로 개판 오브 개판,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 난국을 주최한 죄인의 등더리에서는 아닌 가을에 땀이 줄줄 흘렀다.




두 차례의 장내기능시험과 두 차례의 도로주행시험 끝에 시험관은 내게 면허를 내주었다.

"거 함부로 차 끌고 나갈 생각하지 마시고 연습 많이 하세요."

깊은 한숨과 함께 당부의 말을 덧붙이면서.

아니 그럴거면 면허를 주지 말지, 왜 면허를 주면서 차를 끌지 말래, 참나 그래도 또 떨어졌으면 쌩돈 나가는 건데, 이번에도 떨어졌으면 어쩔 뻔 했냐고, 나참 고마워서 진짜.

툴툴거리는 마음 반, 감지덕지한 마음 반으로 면허증 소지자가 되었다.


이후 학원에다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운전연수도 한 차례 받았다. 세 시간의 연수가 끝나갈 무렵 차를 세워놓고 선생님은 내게 마지막 꿀팁(?)을 전수했다.

"자, 상대운전자랑 시비가 붙으면 일단 차문부터 잠궈요. 뭐라고? 그래요. 차문을 다 잠궈버려. 그러고 창문을 딱 1센티만, 1센티만 열어요. 말소리는 들려야 되니까. 혹시 상대방이 욕을 한다고 해서 기죽지 말고. 보험사에 전화를 해요. 경찰에도 전화하고. 그런데도 계속 욕을 하면서 막 내리라고 하잖아? 그럼 이렇게 해요. '아저씨 왜 욕하세요? 잘잘못을 떠나서 그렇게 욕을 하시면 돼요? 보험이랑 경찰 불렀으니까 오면 얘기하세요.' 딱 그러고 암말 말고 가만 앉아있어요. 절대 차에서 내리지 마요. 보험사에서 다 알아서 할거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은, 내가 언젠가는 한번 사고를 낼 것이고, 그 사고는 100% 나의 과실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로 인해 상대가 나에게 쌍욕과 분노를 쏟아내는 상황을, 세 시간의 운전연수로 훤히 내다보았던 것이다. 나 또한 선생님의 선견지명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며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운전석에 오를 때마다 안전벨트 착용 후 바로 차문을 잠근다. 혹시라도 걸릴 시비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나의 첫 사고상대는 아저씨도 아니요, 아줌마도 아니었으니...심지어 사람이 아니므니다.

사람이 아니므니다. 무생물이므니다.

당시 내가 차로 유일하게 갈 수 있었던 곳은 집에서 고작 2km 떨어진 시립도서관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운전자신감을 쌓아가던 무렵, 오후 느지막히 도서관으로 향한 것이 화근이었다.


오후의 도서관은 오전보다 세 배는 붐볐고 이중주차도 포화상태였다. 주차할 곳이 사라지자 나는 목적지를 잃고 도서관 주변을 뱅뱅 돌았다. 도서관을 코 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아이들은 야단법석이었고, 주차자리를 찾아 길가를 기웃대던 나는 그만 조수석 문짝으로 도서관 맞은편의 고등학교 울타리를 지그시 눌러버리고 말았다. 운전대를 감으면 감을수록 차는 울타리에 밀착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운전대를 반대로 감아 둘을 떼어놓았지만 이미 서로에게 깊은 상흔을 남긴 뒤였다.


이제 어떡한다? 학교 재산을 훼손했으니 물어주는 것이 마땅한데. 학교 행정실로 들어가자니 애들 둘을 데리고 안 될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저 앞에선 아저씨들이 담배를 피며 나의 한심한 작태를 보다못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쪽팔린 건 둘째치고 덜컥 겁이 났다. 저 사람들이 신고라도 하면 어쩌지? 나 남의 울타리 망가뜨려놓고 도망가는 그런 사람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저들이 신고하기 전에 내가 나를 신고하자!


"여보세요? 112죠? 제가 사고를 냈는데요..."


그렇게 황당해하는 경찰 둘, 아우성치는 애들 둘, 이때다 싶은 포교원 둘의 대환장 콜라보가 눈 앞에서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 콜라보의 주최자는 나.


울타리 교체비는 70만원이 나왔고, 보험으로 처리하기로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주행거리가 천키로도 안 되는 관계로 올해 초 나의 보험료는 인하되었다.) 잔뜩 기죽어있던 나에게 동네언니들은 말했다.

"어머머 보통사람 같으면 그냥 갔을텐데...날필이가 참...착하다. 양심적이야."

그 말이 자꾸만 "날필병신호구"처럼 들려서 더욱더 쪼그라들어있던 나에게 남편은 말했다.

"운전을 하면 사고는 꼭 한 번 나게 돼있어. 첫 사고는 원래 크게 나는데 이렇게 넘어갔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작은 사고로 큰 사고 막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울타리도 엄연히 남의 재산인데 물어주는 게 맞지. 잘했어. 잘했는데 다음에는...경찰은 부르지 말자?"




그후로는 별 일이 없었느냐.


아파트 화단에 앞바퀴를 올려버린다든가.

두 개 차로가 하나로 합쳐지는 걸 모르고 역주행을 할 뻔 한다든가.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린 채로 달리다가 차체에서 연기를 일으킨다든가.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가다가 중앙분리대에 사이드미러가 닿아 접힌다든가.


누구나(?) 초보시절에 해봤을 법한 소소한(?) 사건사고가 이어지긴 했지만 보험사나 경찰서에서 출동할 정도의 사고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래도 이제 차선변경같은 건 수월하게 할 수 있으며 유턴하다가 각이 안 나와도 당황하지 않고 살짝 후진해주는 요령도 생겼다.


주행가능 거리는 대략 20km로 열 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문제는 아는 길로만 다닐 수 있다는 것.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못 간다는 것. 목적지 외 경유불가. 평행주차 절대불가. 오로지 집에서 목적지 부근 주차장까지 불도저처럼 직진할 뿐. 내게 있어 네비를 본다는 건 감히 넘보지 못할 고난이도 스킬이다.


옆동네 언니를 태워다주는데 옆동네 경유가 안 돼서 우리동네까지 함께 태우고 와 언니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가게 할지언정. 딱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서 멀쩡한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두 발로 걸어다니며 볼 일을 볼지언정. 운전대를 잡고서는 절대 허세와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운전은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이렇게 조심 또 조심을 해봐도 만년 초보는 종종 뻘짓을 한다. 그럴 때마다 머릿카락이 쭈뼛 서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서늘함을 느낌과 동시에 눈 앞이 하얘진다. 수명이 깎이는 듯한 그 순간의 철렁함이 너무 싫다.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지 싶다. 수명연장을 위해 오늘이라도 운전대를 놓고 싶다. 자율주행 시대여, 속히 도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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