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불태우기 전에 뗏목을 만든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를 깨달았다.

by 정안

새로운 팀에서 일한 한 주. 월요일에 짐을 옮겼는데 벌써 6개월은 일한 듯하다. 일이 돌아가는 루틴이 비슷하기도 하고, 이제는 일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까. 느닷없이 30억짜리 정산을 4일만에 해내야 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일까? 엑셀파일을 정리하고 정리하는 와중에 몇 번 패닉이 왔다. 망했다. 망했어.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니 오래된 나의 패턴이 보였다. 잘 해내지 못하면 망하는 거,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머리가 비상벨을 울리고 있었다.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은 툭하면 화재감지기가 울렸다. 누군가 인센스를 피웠거나 연기가 많이 나는 요리를 했을 때면 여지없이 호들갑스러운 벨이 울렸다. 좁은 여섯평 방에서 화재감지기는 끊임없이 위험하다고 외쳤다. 나중에는 비상벨이 울려도 20층 건물에 사는 누구도 내다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머리에서 살짝 연기가 날 뿐인데, 우린 다 타죽을 거라고 오래된 나의 믿음이 미치광이처럼 외치고 다닌다. 사실 불도 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았는데. 또 나를 불태우며 잘해내려고 했구나. 힘든 티도 내고 재무팀에 도와달라고도 했다. 주말에 출근한 재무팀 선임이 세금계산서 발급을 도와주어서 생각보다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실수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다.


이 주말에 내가 다 해내지 못했어도 난 죽지 않는다. 잠시 연기가 날 뿐이지 그건 불이 아니다. 나를 죽이는 건 불이 아니라 불에 대한 공포구나. 사람은 어떤 믿음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그러니 눈을 뜨고 똑똑히 봐야한다. 불은 나지 않았다고.


아무튼 연기가 펄펄 나는 머리로 수백번 퇴사 생각을 했다. 휴직했을 때 하던 퇴사 생각에서 덜어내진 부분이 보였다. 사회적인 인정, 소속감 같은 것. 막상 소속으로 돌아와보니 소속감은 중요치 않았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스노우볼 속 장면처럼 멀고 희미했다.


다만 명확해진 부분은 돈. 집을 사며 목돈을 썼고 다달이 나가는 원리금이 생겼다. 엄마에게 보내는 생활비도 있고.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퇴직금은 마이너스통장을 채우는 돈이 되고, 한 달을 버틸 유동성도 없다. 물론 퇴직금을 쓰고 알바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월급을 따박따박 받으며 휴직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가정해본 적 없는 상황. 의지가 하늘을 찔러도 경제적 환경이 바닥을 칠 때, 코끝에 물이 찰랑찰랑할 때 내가 어떤지 안다. 아무튼 적정 수준의 경제력은 올바른 생각을 도와준다. 그러므로 당장에 이 배를 불태우는 계획은 이 배에서 뗏목을 만드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올해의 나는 뗏목을 만든다. 배를 불태우고 뗏목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배를 뜯어서 뗏목을 만드는 쪽이 더 좋다.


아무튼 철저히 돈이 중요해서 회사를 다닌다는 걸 생각하자, 마음이 좀 심플해졌다. 돈을 벌고 나의 배를 만들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를 상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연료가 다 떨어져도 가야하기 때문에 엔진을 망가뜨리며 가는 일은 하지 않겠다.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해야한다. 사회적인 인정이나 명예 같은 게 중요하지 않나, 라는 의문이 사라져서 마음이 편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뗏목이 되어줄 돈.


한 주 내내 감기를 앓았다. 마침내 일요일 저녁인 오늘이 되어서야 감기가 조금 떨어졌다. 10분간 태양경배자세로 요가 수련을 했다. 고작 10분인데 숨이 찼다. 몸은 이토록 정직하다. 그리고 에너지카드를 한 장, 툭 뽑았다.


성취: 목표를 이루어 내고 노력의 결실을 거두는 뿌듯함.


요즘 바뀐 마음가짐 중 하나가 일을 작게 쪼개는 것이다. 아주 커다란 과업을 해내야만 성취가 오는 게 아니다. 오늘 몸을 움직인 것, 차크라카드 사용법 영상을 본 것, 이렇게 엎드려 일기를 쓰는 것 모두가 성취다. 난 아주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이렇게 작은 순간순간을 쪼개어 잘 살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어떤 산책을 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