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하는 거라고 쉬운 건 아님
사람은 나이가 차면 모부님의 곁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지만 보통은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신 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결혼이나 이사를 하면서 독립한다. 내 경우는 비혼 결심을 하면서 결혼이라는 방법을 선택지에서 제외했지만, 해외에 나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부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확실하게 말하긴 어렵다. 서른을 넘긴 이 나이에도 아직도 독립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는 나는 '모부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개념을 경제적 독립, 정서적 독립 그리고 물리적 독립으로 나눠서 생각해 봤는데, 각각의 독립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1.
나는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자라왔고 서울 소재의 대학을 다니고 한 동안 서울 소재의 직장에서 일했던 덕분에 성인이 된 후에도 모부님과 함께 지내왔다. 나는 스무 살 이후로 내 인생의 대부분의 일을 내가 결정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집 바깥에서 아무리 주도적으로 활동한다고 한들, 일단 의식주 기반 자체는 모부님께 의지한 셈이다.
경제적인 독립 부분은 사실 그래서 굉장히 애매하다. 스무 살 이후부터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나는 '공식적으로는' 모부님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등록금은 운 좋게 아버지의 회사에서 대부분 지원되었다. 또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내 개인 생활비는 과외와 알바로 충당했다. (물론 모부님 집에서 사니까 용돈 정도만 벌면 되니 대단한 것은 아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내가 외부에서 받아온 장학금과 이전에 모아둔 장학금, 알바로 모은 돈을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갔다 왔다. 석사는 전액 장학금 과정으로 입학했고 또 조교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대학원 졸업하기 전에 회사를 몇 년 다니면서 또 생활비와 유학 준비 자금을 마련했다. 박사 유학도 풀 펀딩을 받아서 왔고. 하지만 이 과정을 경제적 독립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뭐 나름대로 열심히 산 것은 맞지만 모부님이 가끔 용돈도 주셨고, 또 모부님 집에서 지내니 밥 값이나 생필품, 방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 내가 이른 나이에 가계 생계를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이 과정 동안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서른이 넘은 나이까지 공부를 하고 있고 경제활동으로 완전히 자립할 수준은 아니니까.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모아놓은 돈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영역이 있어서 부끄럽지만 몇 번 합의 하에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표면적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어느 정도 스스로 해결해왔다는 것은 내 행동의 의사결정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 시작하면서 원하는 것을 소비할 자유를 얻었다. 이전까지는 모부님의 용돈으로 좋아하는 음반이나 굿즈를 사면 이러라고 준 돈인 줄 아느냐는 핀잔을 들었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20대 초반의 나는 내가 번 돈을 정말 (모부님이 보기에) 쓸데없는 곳에 열심히 썼다. 이를 테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쓸데없이 거대한 인형을 사 오거나 중고 동인지 세트 박스 수 십 개를 집으로 배달시키거나 클래식 기타를 집에 짊어지고 들어오곤 했는데 놀란 모부님은 내가 언제부터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사실 이런 사소한 부분들 뿐만 아니라 진로에 관한 부분에서도 나는 좀 더 자율적일 수 있었다. 나는 석사 대학원 진학할 때 전액 장학금을 보장받고 난 후에 모부님께 석사 진학을 '통보'했는데, 모부님은 당황하긴 하셨지만 역시나 나를 말리지는 않으셨다. 모부님의 원래 플랜은 내가 학부를 졸업한 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면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남동생 대학 등록금을 부담시킬 계획이셨던 것 같긴 한데, 나는 그냥 모르는 척했다. ^^... 사실 모부님 도움 없이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까 (일반적인 한국 장녀에게 수반될) 다른 책임을 모르는 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사 유학도 어쨌든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가니 모부님이 나에게 조건을 내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경제적인 독립을 완전히 이룰 시기는 아마 학위를 마치고 자리를 제대로 잡은 후가 될 것 같다. 사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서 바로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꽤나 늦은 편일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박사 유학생들은 불가피하게 모부로부터 어떻게든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아서, 주변이 이렇다 보니 나도 현실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있다.....
2.
정서적 독립은 의외로 확실한 계기가 있었다. 20대 중반쯤에 우울증이 심해져서 결국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한동안 받았을 때였다. 나는 상담사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모부와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이고 내가 좀 더 나아지려면 정서적으로라도 독립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성인이 된 내가 모부와 함께 지내면서 삶을 간섭받는 스트레스도 꽤나 심각했던 거였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한테 있던 우울증과 불안을 증폭시키기엔 충분했다.) 모부님도 나를 성인으로 완전히 인지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고, 나도 그런 상태를 싫어하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의존하고 있었던 게 문제라고 했다. 그런 종류의 지적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꽤나 신선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경제적으로 마이웨이 하고 있었던 터라 내가 정서적으로 모부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자각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었지만 집안에서의 생활 패턴은 어릴 때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으니까. 모부님이나 나나 어릴 때부터 구축해온 습관을 관성적으로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테면,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엄마가 내 방이 더럽다며 내 물건을 다 정리해버려서 나는 또 엄마가 멋대로 정리해놓은 내 물건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다가 화를 내는 일. 혹은 내가 집에서 밥을 먹을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숟가락을 대충 쥐고 먹으면 엄마가 예의 없다고 지적을 하고, 나는 그 얘길 듣고는 밥도 내 맘대로 못 먹냐고 화를 내는 일 등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어져온 흔한 갈등이라서 이게 문제라는 인식도 못했던 거였다. 집안일로 인한 갈등의 경우,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데 나를 포함한 식구들이 협조를 안 해줘서 화가 나는 것이고, 나는 나 나름대로의 삶의 호흡이 있는데 엄마의 스타일과 방식이 안 맞으니 영원히 싸울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래서 하루는 날을 잡고 엄마랑 대타협을 했다. 사실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지만 같이 한 집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약속들이었다. 내 방은 언제 어느 정도로 청소해놓을 테니 엄마는 마음대로 청소하지 않을 것. 대신 나도 엄마랑 약속한 공간은 어지럽히지 않고 제때 정돈할 것. 빨래는 어떻게 내놓을 것. 밤늦게 귀가할 때는 11시 정도까지 통보할 것. 집에서 밥을 먹을 땐 언제까지 엄마에게 알려줄 것. 나도 성인이니까 이제 애들한테 잔소리하듯이 밥 숟가락 붙잡는 위치 같은 이상한 걸로 잔소리 좀 그만할 것. 등등. 굉장히 사소한 데 당시엔 민감했던 문제들이었다. 사실 완전 타인과 함께 살 때는 미리 정하는 부분들일 텐데,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협의 없이 그냥 암묵적으로 행동해왔던 사항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각자 정해버리니, 각자의 약속이 달라서 싸움이 났던 것이기도 하고. 나에게 이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를 하니 엄마도 다행히 내가 무엇을 왜 힘들어하는지 이해해주셨고 같이 노력해주셨다. 물론 아빠와도 타협을 해야 했겠지만, 우리 집 권력구조상 엄마와 합의가 되면 아빠와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상황을 정리를 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서로에게 적응하느라 꽤 힘들었는데, 그래도 적응하고 나니 내 정서가 한결 편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얼마 안 있어 나이 차이가 꽤 났던 남동생의 대학 진학과 동시에 엄마는 자신의 삶을 찾아 집 바깥의 당신의 관심사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적당히 관심이 없어진 탓도 있었다. 자취를 시작한 건 그 후의 일이지만, 저 일을 계기로 나는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모부님께 심적으로 덜 의지하게 되었고, 모부님도 내 생활 전반에 대한 지나친 간섭은 줄이시고 나를 조금 더 존중해주시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다 하고 모부님과는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화만 나누거나 같이 결정해야 할 일만 의견을 구하는 정도의 관계를 성립하게 된 것 같다.
3.
물리적 독립을 위해 내가 자취를 시작한 건 미국에 오기 전,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취직하면서부터이다. 20대 중반부터 집을 떠나고는 싶었지만 학교도 직장도 대부분 서울에 있었으므로 돈을 모을 때까진 집을 나갈 만한 그럴듯한 핑계가 없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집을 나갈 돈을 모으기는, 다들 알겠지만 정말 쉽지 않다. 결혼이라도 해야 집을 나갈 수 있는데 나는 비혼을 결심한 상태여서 정말 답이 없었다.
유학을 못 갈 거라고 판단했을 무렵 나는 무작정 다른 지역의 한 회사에 입사를 결정해 버렸다. 회사 자체는 괜찮은 곳이었는데 유일한 단점이 시골에 있다는 점일 뿐인 곳이었다. (지역 소도시가 아니라 진짜 시골이었다.) 사실 충청도였기 때문에 기를 쓰면 원래 살던 서울에서 통근을 할 수 있긴 했지만 나는 회사 핑계를 대면서 근처의 월세 원룸을 구해버렸다. 그렇게 얼렁뚱땅 자취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취를 한다는 건 사실 완전한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방 계약할 때도 부동산 사기가 겁 난다고 어머니와 동행했으며, 이사한 후에도 어머니가 가끔 들러서 집안 냉장고에 밑반찬을 채워주기도 했다. 가끔 본가에 들러서 살림살이들을 조금씩 훔쳐오기도 했다. 서울에서 주말 동안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면 서울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으므로,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모부님을 꼬박 만났다. 그래도 모부님과 따로 생활하게 되니 나름의 생활습관이 형성되었고 심리적으로도 자유로워진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혼자 쓰던 방이 커진 수준에 불과했다. 회사 사람들과 비슷한 경제 상황이었으므로, 재테크는 어떻게 하고 대출은 어떻게 받고 차는 뭘 사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형화된 트렌드가 있어서 남들 하는 것처럼 살면 되겠지 싶어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갑자기 미국에 오게 되었다. 내가 있는 지역은 한국에서는 낯선 곳이라 직항도 없어서 모부님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았다. 이제 살 집도 내가 구해야 하고, 살림살이도 오롯이 내가 채워야 하며, 차도 내가 사야 했고, 등록금과 각종 비용도 내가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익숙했던 한국에서와는 난이도가 달랐다. 미국은 문화도 다르고 절차도 달랐다. 보고 배운 게 없어서 이 동네에서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감도 없었다. 외국인이라서 가진 돈도 없고 서포트도 없었으며 서류 절차가 더 복잡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긴급한 일이 생기면 오로지 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모부님은 미국에 와본 적도 없는 분들이시고 지리적으로 어차피 너무 멀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다. 정말 완전히 독립을 해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꽤나 부담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남들은 결혼을 통해서 완전히 시작하는 진짜 독립을 나는 미국에 오면서 시작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인생의 통과의례를 치른 셈이다. 하지만 세상 일들이 다 그렇듯 남들도 다 한다고 해서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가족을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건 꽤나 슬픈 일이었다. 물론 기술이 좋아져서 인터넷만 연결되면 비싼 국제전화 요금 없이도 수시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영상통화도 할 수 있지만 직접 만나고 함께 생활할 수는 없으니 가족이 무척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여기에도 이제 친구들이 꽤 있지만 그래도 아주 편하게 대할 가족 같은 사람은 없다는 점은 종종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곤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개였다. 다른 집 개들은 티비도 본다는데, 우리 집 개는 아직도 영상통화를 못한다. 아무래도 화면을 볼 줄 모르는 것 같다. 이건 진짜 아직까지도 나에게 심각한 문제다. 식구들이 몇 번 시도해봤는데 항상 실패했다. 몇 년 내 얼굴을 못 보면 까먹을까 봐, 혹은 버림받았다는 기분을 느낄까 봐 늘 걱정이 된다. 그리고 애견인들이라면 알겠지만 강아지 발바닥 꾸릉내를 맡거나 강아지의 푹신한 엉덩이를 조몰락 거리는 것만으로도 큰 힐링이 되는데 개와 교감을 못하니 그 상실감이 어마 무시하다. (하지만 여기서 개를 다시 키울 생각은 아직까지 없다. 개는 가족이고, 내 개는 다른 개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 전화할 때마다 훈련은 시켜보는데 이름을 부르면 귀는 쫑긋 거려도 도대체 화면을 볼 생각을 안 한다. 대체 언제쯤 우리 집 개가 영상 통화하는 법을 배울지 의문이다.
(영상통화를 못하는 견 - 사진출처 : 누가 봐도 본인)
그래도 독립이란 건 결국 이러한 종류의 그리움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추억에 머무를 수 없고 모부님 아래의 안락함에 안주할 수 없으니까. 언젠가는 공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어린 시절로부터 떠나야 할 텐데,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해서 아주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1년 차 때엔 한국 자체에 대한 향수병이 있어서 시험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한 달 정도 가족들과 다시 지내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미 독립을 해버렸고, 가족들의 공간에 더 이상 내 자리는 없다는 것을. 일단 내가 지냈던 영역을 동생의 짐들이 다 점령해버려서 내 자리도 없었고 2주쯤 지나니 애틋함도 사라져서 식구들의 잔소리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향수병에 가려져서 잠시 잊고 지냈던, 기를 쓰고 독립하려고 했던 그 생활의 불편함도 다시 기억나기 시작했다. 여동생과 같이 자는 잠자리가 불편해서 '내 방'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내가 그 어린 시절의 공간에 되돌아간다고 해서 과거의 그 관계까지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오히려 다시 미국의 내 공간에 돌아왔을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했다. 결국 내가 나의 공간이라고 여기는 곳은 모부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내가 꾸린 내 공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가끔 큰일이 닥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가족의 힘이 그립고 기대고 싶긴 하다. 하지만 그런 그리움을 또 견뎌내는 동안 나는 혼자 살아가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오롯이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독립은 아직 진행 중이다.
4.
(화장실이 사진에서 보이지도 않음. - 사진출처: 본인)
한 번은 사막이 보고 싶다며 몽골로 여행을 갔었다. 고비사막 투어를 했는데, 하루는 모래폭풍이 아주 심하게 부는 날 밤에 화장실을 가야 했다. 푸세식 화장실은 모래사막 한가운데 있었고, 내가 잠을 자는 게르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게르를 떠나 손전등 하나만 달랑 들고 화장실까지 가야 했다. 낮에 가면 훤히 보이니까 어렵지 않은데, 달빛도 없는 밤에 걸어가려니 정말 막막했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손전등을 들고 있는 손을 들고 있기도 어려웠다. 주변에 정말 모래밭뿐이었기 때문에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 손전등을 비춰도 딱 주변만 보일 뿐 화장실을 찾기 쉽지 않았다. 내가 만약 방향을 조금만 잘못 틀면 화장실을 지나쳐서 끝없는 사막 한복판으로 한없이 걸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화장실에 가서 별을 보면서 시원하게 볼 일을 잘 보고 다시 돌아왔는데, 물론 돌아오는 길도 쉽지 않았다. 역시나 손전등을 비춰도 너무 어두운 밤이어서 게르 근처에 가기 전까지는 모래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르로 무사히 돌아와서야 안도를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집을 나오니 똥 싸는 일 하나가 이렇게 힘들 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독립이란 것도 결국 비슷한 것 같다.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을 떠나 볼 일을 보기 위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망망대해 같은 세상 밖으로 떠나야 하는 것. 가족을 떠난 내가 이제 볼 일 한 번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집을 마련하려면 돈도 벌고 집도 구하고 이사도 가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막힌 변기도 뚫으면서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일단 집을 떠나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종종 좋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심적으로 의지할 수는 있겠지만 가족이 아니니까 타인에게 내 삶을 완전히 의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자서 걸어가니 막막하다는 생각도 들고 바람이 불듯이 이런저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기도 하다. 비혼을 결심했지만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다시 자신 만의 가족을 꾸리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종종 해본다. 하지만 다시 몽골의 사막을 생각해본다. 게르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먼 여정이 너무 힘들면 타인과 동행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화장실에 들어가서 변기에 앉아야 하는 건 나 혼자다. 그건 죽어도 남이랑 함께 할 수는 없다. ㅋㅋㅋ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동행이 있더라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내 삶은 내가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사실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아직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지 아직 몇 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가족과 지냈던 시간들이 나 혼자 지낸 시간보다 더 많다. 이런 상태에 좀 더 적응하고, 어디서든 잘 버틸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되면 나는 진짜 독립을 하게 될 거라고 늘 생각하곤 한다. 이건 나이와 상관없는 일이다. 나보다 더 이른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지낸 사람들, 혹은 적응력이 빠른 사람들은 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나름대로의 요령도 가지고 있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나에게도 아직 더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한 걸 테다. 앞으로의 생을 혼자 살아가기로 결심한 만큼 감내해야 할 삶의 과정일 것이다. 삶의 독립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