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영어로 적힌 문장을 읽는 것이 버거워질 때가 있다. 가로 8.5인치, 세로 11인치 용지를 빼곡하게 채운 작은 글씨들을 훑어보는 것도, 거리에 늘어선 표지판을 읽는 것도 귀찮아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책상에 앉아 한글 문서를 켜고 시선을 하얀 화면에 고정시킨다.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기간이 끝날 때쯤 산 LG 노트북 자판에는 한글 자모가 적혀있지 않다. 오른쪽 아래 알트키를 누르고 손가락 끝이 기억하는 대로 글자를 조합해본다. 깜빡거리는 커서가 자판 한가운데에 큼지막하게 찍힌 대문자 알파벳을 무시한 채 멈칫거리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여간다. 이미 쓰였던 글자가 다음에 쓰인 글자에 맞추어 작아진 뒤 정사각형 안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나간다. 한문단을 다 채운 뒤 손을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가 글을 작은 소리로 읽을 때, 단어의 뜻과는 별개로 문장과 나란히 흐르는 우울함을 들을 수 있을 때면 나는 이곳에서 다른 한국인들로부터 듣는 가장 흔한 질문을 다시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여기서 계속 살 생각 있어?"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영어는 행복한 사람들의 언어이다. 아무리 슬픈 이야기를 하더라도 소리 내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입이 양쪽으로 끝까지 벌어진다. 그 뜻과는 관계없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경고문도 마찬가지다. 'Danger', 'Fragile', 'Toxic'. 이빨을 더 많이 드러낼수록 더 발음이 원어민에 가까워진다. 이 말을 하고 있는 내가 이토록 행복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더 명확히 알려줄수록 발음이 더 원어민에 가까워진다. 아무리 말해보아도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다. "How are you?"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웃으며 "Good, how are you"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말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말을 시작하기 전에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어로 말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행복해질 것이다. 나는 그러한 대화가 부담스럽다. 잘 지내냐고 물을 때,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한국어로 말할 때는 입을 크게 벌려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된다. 높낮이가 명확한 악센트를 따라 쉼 없이 뻗어나가는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받침소리에 막히고, 치읓과 키읔에 닿아 날카롭게 부러진다. 그러기에 한국어는 절망을 이야기하기에 썩 적합한 언어다. 부서진 감정을 그에 걸맞은 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생략된 채 단어들이 삐걱거리며 이어져나간다. 부자연스러운 'I' 대신 습관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주어로 삼을 때, 혼잣말처럼 이어지던 슬픔은 한글 자모가 서로 맞물려 글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말을 할 때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 슬퍼도 된다. 나는 이러한 자유가 마음에 든다. 비극을 이야기하는 한국어 가사가 억세게 심장을 후벼 팔 때, 나는 기름진 영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청량함을 느낀다. 소속감을 느낀다.
이곳에서 계속 살 생각이 있냐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동아시아에서 왔을 이민자들의 자식들이 지닌 특유의 표정을 떠올린다. 크게 다르지 않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상하게도 행복해 보인다. 행복한 표정으로 영어로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며 위화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위화감을 아마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곳에서 살려면 아마 영어를 더 잘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정도면 괜찮다는 위로를 들을 때, 나는 일부러 입을 크게 찢어 웃으며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그냥 흉내 내는 것일 뿐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