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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31. 2023

지나친 연구는 정신에 해롭다

Overdose

이 연구가 결국 실패할 것임을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이론 속 방정식은 무심한 채로 하늘에 둥둥 떠다닐 뿐 사람이 겪는 작고 보잘것없는 일들에는 그 빛을 밝혀주지 않는다. 분명 세상의 다른 누군가가 이미 시도해 보고 남겨두었을 실험 기록은 그 연구실 속 어딘가에 숨겨진 채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글러브 박스 안으로 손을 뻗는다. 고개가 샘플을 향해 아래로 떨어지고, 이마가 유리판에 눌린다. 저번과는 아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샘플을 만든다. 카페인이 혈관을 따라 돌고, 뇌에서 파직거리는 생각에 근육이 따라주지 않아 손가락이 헛돈다. 3겹으로 된 고무로 쌓인 손가락으로 쥔 핀셋 끝에 잡혀있던 샘플이 아래로 떨어진다. 신경질적으로 팔을 글러브박스에서 뺀다. 아르곤 가스가 파이프 사이를 지나 글러브박스로 들어가면서 비명을 지른다. 연구실 문을 발로 차 밖으로 나간다. 일요일 낮,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원하는 바는 명확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내가 여기서 내 힘이 다할 때까지 이룰 수 있을지 또한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 인해 특별히 무언가를 얻고자 함은 아니다. 세상에 무언가 좋은 영향을 남기고 가고 싶다는 위인전에 나올법한 그런 동기로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다 원초적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감정이 육체를 지배한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아이 같은 짜증, 그럼에도 자연이 정해둔 규칙들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분노, 그리고 대부분 실패로 이어진 가설들 속에 너무 오래 잠겨 있던 뇌에 스며든 금단 증상이 내 몸을 연구실로 다시 내몬다.


글러브박스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실험기구들을 바라본다. 카페인에 절여진 뇌는 실험기구가 깨끗하게 씻겨 정리된 미래에 이미 도달해 있다. 한낱 실험학자일 뿐인 몸이 그 미래를 향해 어기적거리며 움직인다. 숨을 참고 글러브박스의 안티챔버 (antechamber)를 연다. 황화수소 (H2S) 냄새가 콧속에 맴돈다. 유기용매로 실험기구를 씻는다. 아이소프로파놀 (isopropanol)과 에탄올 (ethanol) 기체가 뇌에 끼인 생각들을 지워 머리를 몽롱하게 한다. 몸의 피곤함이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던 머리의 뒤통수를 후려쳐 현재의 내 모습을 바라보도록 한다. 오늘 더 이상 연구를 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도피다. 뇌는 남은 에너지를 쏟아낼 일을 원하지만, 몸은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한다. 눈이 감겨 더 이상 새로운 정보가 쌓이지 않는다. 헛도는 채로 불만이 쌓인 뇌가 스스로를 파헤치면서 아래를 향해 무너져 내린다. 영어로 쓰인 학술자료들이 가득한 층을 뚫고 내려가 한국어로 된 기억과 감정들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놀라서 허우적거리는 손가락이 찰칵거리며 키보드 위를 긁어대고, 위로 스쳐 올라가는 단어들을 뽑아서 화면에 던져놓는다. 현재와 맞닿아 있는 경계면이 멀어져 가며 의식이 흐릿해진다. 나는 이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내가 오늘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내일은 찾아올 것이고, 그러기에 나는 걱정 없이 오늘 쌓인 내 기억들을 난도질하여 글을 쓴다.


내일 나는 연구실로 돌아가 또다시 괴로워할 것이다. 그리고 아픔이 임계점을 넘으면 또다시 글을 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미 알면서도 도망칠 방법을 찾지 않는 나는 분명 이 고통에 중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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