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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07. 2015

옛날칼국수

원래는 피순댓국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순대에 선지를 넣어 만들었다는 피순대는 전주 남부시장 명물이고, 남부시장 청년몰의 바 '차가운새벽'에서 한 잔 할  생각인 내게는 딱 맞는 점심 장소였다. 


세 시를 조금 넘은 시간. 식당은 찾기 쉬웠다. 하지만 그 무렵이면 아무리 유명한 식당이라도 한가할 거라는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겨 나고 말았다. 웬걸, 식당 안엔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들어가 순댓국을 주문하기란 내 정서에도 맞지 않았고 식당에도 불편한 일이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나는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손님이 빠지기를 기다렸지만, 손님이 줄어들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신포도를 싫어하는 여우가 됐다. 


“어차피 순댓국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피순대라니. 나한텐 안 맞을 거야.”


한 번 그렇게 마음 먹고 나니 주변에 다른 순댓국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점심을 걸러 배가 꽤 고팠고, 무언가 먹기는 먹어야 했다. 그래야 술을 마실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시장을 빙빙 돌다가  ‘옛날칼국수’라고 적힌 식당을 봤다. 


서울 같았으면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여기는 전주고 또 칼국수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 아닌가. 지나칠까 하다가 90도로 걸음을 꺾어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갔다. 뜻밖에도 열 개 정도 되는 테이블 중 서너 테이블에 손님이 있었다. 나는 문 앞 테이블에 얌전히 앉았고 다른 팀 계산하러 나오는 누님을 향해 옛날칼국수 주세요, 조용히 주문했다. 누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칼국수를 기대하던 내 앞에 상추로 뒤덮인 스뎅(!) 대접이 나타났다. 예상하지 못한 비주얼에 순간 당황했는데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챘는지 누님이, 보리밥은 서비스예요, 하고 거들었다. 아, 상추 밑에 보리밥이 있고나. 달달 비벼 먹으며 칼국수를 기다리는데 입에서 도는 보리밥알이 묘하게 재미났다. 


칼국수가 나왔다. 내가 아는 옛날칼국수와 다르게 생겼다. 어릴 적엔 칼국수를 싫어했고 그래서 내가 아는 칼국수는 엄마의  칼국수뿐이다. 엄마의 칼국수는 맑은 국물에 투박한 면, 그리고 호박과 감자가 큼직하게 들어 있었다.  

아무렴 어때. 국물을 한 입 떠 먹었다. 그리곤 막 웃음이 났다. 생긴 건 달랐어도 엄마가 해준 칼국수의 멸치 다시다 맛이 그대로 났다. 아니, 이거 왜 이렇게 맛있니. 정말로 게눈 감추듯 정신없이 먹었나 보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마시고 흐르는 땀을 닦은 후에야, 잘 먹었네 하며 숨을 쉬었다. 때마침 손님은 계속 들어오고 나는 내 옆 테이블에 들어온 다섯 명 손님을 위해 기꺼이 일어섰다. 돈을 내면서 저절로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보리밥 서비스 포함해서 4천 원. 5천 원짜리 내고 천 원을 거슬러 받기가 왠지 민망했다. 


유명한 맛집이 아니었던들 어쩌리. 게다가 나를 더 기분 좋게 했던 건 내 주변에 온통 그곳 사람이었다는 거다. 장사하다 잠시 허기를 달래러 온 아저씨, 돈가스 세트와 칼국수를 시킨 가족, 오래 오래 칼국수를 삼키던 할머니, 사투리 귀여웠던 젊은 커플… 그래, 내가 원하는 맛집이란 이런 거였다. 현지 와서 현지인처럼 먹는 것. 


물론 언젠가 나는 그 유명하다는 피순댓국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못 먹었다고 아쉬울 것도 없었고 언젠가는 꼭 먹고 말겠다는 다짐도 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맛있게 한 끼를 즐겼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맛집이란 바로 이런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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