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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13. 2023

고양이의 신뢰

우리는 몇 점짜리 부자가 될까.


다들 잠든 시간이거나, 아무도 집에 없을 때, 즉 놀아줄 사람이 나 하나 밖에 없을 때, 우주는 내 의자 밑에 와서 미야옹을 시작한다. ‘아빠 밖에 없으니 아빠는 나하고 놀아줘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 ‘우주야, 아빠도 할 일이 있지,’ 라고 해봐야 미야옹을 멈추지 않는다. 아빠가 날 데려오자고 했으니 책임을 지라는 뜻이다. 대체 누가 너에게 그런 사상을 집어넣었느냐, 하고 물어봐야 결국은 나다.


내 상태가 괜찮다면 사냥 놀이라도 하겠지만 그다지 좋지 않다면 나는 우주를 들어 조용히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 책상 위에 올라올 방법은 그거 하나 밖에 없다. 반대로 내려올 방법도 그거 하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호기심 천국인 우주는 모니터 뒤는 물론 받침대 밑, 스피커, 스탠드, USB허브 등등 책상 위 곳곳을 삐집고 다닌다. 어릴 때는 받침대 밑으로도 들어갔는데 지금은 안된다. 들어가려고 시도는 하지만 곧이어 포기한다. 당연하지, 몸무게가 두 배 이상 늘었는데 - 물론 키도 컸지만 - 아무리 고양이 액체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틈엔 못 들어간다. 포기는 했어도 마음에는 들지 않는 우주.

요런 사진 꼭 한 번 찍고 싶었다.

모니터를 한때 좀 쳐다보길래 유튜브에서 고양이가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줬는데 길게 봐야 5분, 금세 딴 데로 눈길을 돌린다. 아빠 닮아서(!) 집중력은 초단기다. 구석 구석 다 탐험했는지 이제 내려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책상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다녀 보지만 도대체 내려갈 구석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 왕복한 후 내 눈치를 본다. ’아빠가 올려 놨으니 아빠가 내려놔야지.‘ 하는 말이렸다. 하지만 나는 내려줄 생각이 당연히 없다.


의자를 뒤로 뺀 후 허벅지 모아 책상 밑에 두고 “우주야, 이리로 내려와.” 를 몇 번씩 중얼거린다. 우주도 그러라는 걸 알아는 챘는지 책상 위에서 내 허벅지까지 뛸 수 있을까를 잰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 끝에 포기한다. 아직은 아빠라는 인간을 믿을 수가 없나 보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어제 밤엔 믿을만 했던지 허벅지를 모아주니까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냥 뛰어내리더라. 문제는 허벅지에서 바닥이 멀어 거기서 뛰어내릴 수 없다는 거지만 그래도 허벅지까지 뛰어내린 게 어딘가. ‘우주가 드디어 아빠를 믿어준다,’고 신난 나는 사방에 떠들 뻔(심야시간이라서...) 했다. 그러더니 오늘은 다리를 꼬고 있는데 그 위로 뛰어내렸다. 오, ‘적어도 아빠라는 이 인간이 나를 떨어뜨리지는 않겠구나.’ 확신이 선 것 같다.


사람도 처음 보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는데 태어난지 100일을 넘긴 아기 고양이가 어찌 나를 믿을까, 하는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다가도 너무 기특해서 자꾸 우주 머리를 쓰다듬게 된다. 고양이 덕분에 접촉성 피부염이 생겨 의사 쌤은 절대 접촉하지 말라는데도 그냥 만지게 된다. (가족들이 다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가 모두 나았는데 나만 잘 안 낫는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아내는 말을 하지만 내게 뭘 사다 먹일 생각은 안한다. 영양제 잔뜩 먹이는데 뭐가 문제냐? 하는 마음이겠다. 사실 나도 불만은 없다. 아니 얘기는 왜 또 이리로 빠져가지고는).


아빠가 고양이의 신뢰를 1점 얻었습니다, 라고 흐흐거린다. 우주와 나는 몇 점까지 쌓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빠져들 뻔한 걸 간신히 멈췄다. 신뢰는 노력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만큼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아야 한다, 는 걸 새삼 깨닫는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참, 철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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