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시작점
뮤지컬 ‘레드북’은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로 대학로 창작 뮤지컬의 신화를 써 내려간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가 합을 맞춘 두 번째 작품이다. 2016 창작산실 올해의 뮤지컬에 선정된 이후 2017년 트라이아웃으로 첫선을 보인 ‘레드북’은 꾸준히 수정과 개발을 거쳐 2018년 정식 공연을 올렸다. 올해 3년 만에 돌아온 재연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더욱 규모를 키웠다.
‘레드북’은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약혼자에게 첫 경험을 고백했다가 파혼당하고 도시로 건너온 여인 안나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에게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리는 남자 브라운이 찾아와 의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응원을 건넨다. 마침내 안나는 여성들만의 고품격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에 들어가 자신의 추억을 소설로 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대라는 것. 안나의 소설이 담긴 잡지 '레드북'은 사회적 비난과 위험에 부딪힌다.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 게다가 1831년부터 1901년까지가 배경인 작품이 이질적이지 않다. 현재 우리 사회를 무대 위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레드북’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추고 낮춰야만 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성차별과 성희롱 등 여전히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사회적인 사안을 무대 위에 녹여냈다. 그렇다고 작품이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안나를 둘러싼 이야기는 발칙하며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매일 현실과 남성들에게 치이는 안나는 단 한 번도 기가 죽거나 외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덧붙여 자신의 목소리를 우렁차게 외친다. 지칠 만도 한데 그녀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세상의 비난과 편견을 무릅쓰고 작가로서 성장하는 안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레드북’은 이렇게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레드북’은 창작 뮤지컬에서 보기 드문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잡은 작품이다.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은 데다가 뚜렷한 성격을 지닌 모든 등장 인물들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을 열렬하게 응원해주고 싶은 ‘해피 엔딩’은 보는 이들의 바라고 바란 희망찬 결과다.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여러 장르가 섞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는 점이다. 사회 고발적인 다큐멘터리인듯하다가, 꿈을 찾는 청춘물인듯싶다가도, 알콩달콩 싸우면서 사랑이 피어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기에 개성 강한 캐릭터들은 이런 장면마다 장르적 특성을 돋보이게 만든다. 또한 드라마와 잘 어울리는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곡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외에도 슬플 때면 야한 상상을 하는 안나의 특별한 ‘올빼미’가 등장하는 ‘올빼미를 불러’, 브라운의 쌍둥이 친구 잭과 앤디가 딱딱 떨어지는 박자와 스텝을 보여주는 ‘신사의 도리’, 로렐라이 언덕의 회원인 줄리아, 메리, 코렐이 자신을 소개하는 ‘우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여인들’ 등은 풍부한 감성과 재미를 건넨다.
새로운 프로덕션으로 구성된 이번 시즌은 소소한 변화를 맞았다. 박소영 연출가가 새롭게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각 캐릭터의 과거 서사가 탄탄하게 보완됐다. 은유적인 연출과 대사들로 신선함을 더한 것도 좋은 평을 주고 싶다. 안나 역에 차지연, 아이비, 김세정이 출연한다. 브라운 역에 송원근, 서경수, 인성(SF9)이 무대에 오른다. 외에도 홍우진, 정상윤, 조풍래, 방진의, 김국희 등이 캐스팅됐다.
‘레드북’에서 성추행과 성희롱을 일삼던 평론가 존슨은 마침내 그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던 ‘중심’을 잃고 만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본보기인 셈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레드북’은 뮤지컬이다.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제20전투비행단 소속 여성 부사관의 성추행 사망 사건은 사건 보고가 고의로 누락되었고, 여전히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사회를 가만히 지켜보다 ‘레드북’을 더 응원하게 됐다.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외침이 언젠간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늦더라도 꼭 그렇게 될 거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니까.
* 온라인 연예매체 <뉴스컬쳐>에 기고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