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물랑 루즈!>는 여러모로 화제였다. 대중에게 익숙한 음악을 사용한 주크박스 스타일,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화려한 프랑스 물랑루즈를 재현해낸 아름다움, 색다른 연출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았고, 오스카상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언젠가는 이 영화가 뮤지컬로 탄생할 것이라는 예상했지만, 그것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늦게 실현됐다. 2016년에야 호주의 글로벌 크리에이처스가 제작을 맡고,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알렉스 팀버스 연출가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들린 이후에야 뮤지컬화의 긍정적인 기대가 내비쳐졌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뮤지컬 <물랑 루즈!>는 2018년 여름 보스턴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시작으로 탄생을 알렸다. 무엇보다 한국 뮤지컬계에서도 이 뮤지컬에 큰 관심이 쏟아졌는데, 공연제작사 CJ ENM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동안 CJ ENM은 꾸준히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에 대한 의지를 다져왔고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간의 학습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뛰어든 <물랑 루즈!>에서는 공동 제작자 지위를 확보하고 약 100만 달러를 투자하며 꽤나 많은 노력을 쏟았다.
Musical <Moulin Rouge!> photo by Matthew Murphy
다른 어떠한 공연보다도 더 <물랑 루즈!>는 화려함에 집중한다. 브로드웨이 한복판에 있는 알 허쉬필드 시어터를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프랑스의 고급 극장 물랑루즈로 공간이동을 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극장의 모든 부분을 붉은 색과 보석으로 장식했고, 작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풍차와 중요한 의미를 갖는 큰 코끼리상까지 무대 양 옆에 자리하며 공간이 주는 몰입감을 높인다. 영화 <물랑루즈>의 대표곡인 'Lady Marmalade'의 뮤직비디오 무대를 연상시키는 하트가 겹겹이 쌓인 무대에 가벼운 탄성을 내뱉고 난 후면, 어느 새 앙상블 배우들이 한 명씩 무대로 등장해 매혹적인 몸짓을 선보인다. 즉, 극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공연은 시작된 것이다.
<물랑 루즈!>는 원작 영화의 스토리는 물론이고, 주크박스 스타일을 그대로 따왔다. 뮤지컬은 원작 영화보다 훨씬 많은 약 70곡의 팝송을 사용하는데, 클래식부터 힙합까지 장르는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앙상블 배우들의 화려한 쇼로 혼을 쏙 빼놓는 오프닝은 'Lady Marmalade'로 시작해 힙합 가수 넬리의 'Ride With Me', 데이브드 보위의 'Let's Dance', 오펜바흐의 연주곡 캉캉까지 약 10곡이 이어진다. <물랑 루즈!> 속 노래를 아주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비욘세의 'Single Ladies', 마돈나의 'Material Girl', 퀸의 'Play The Game', 앨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 등으로, 따로 뮤지컬 넘버를 예습하고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결국 작품의 노래를 듣다보면 마치 '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넣었어'라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익숙함과 놀라움을 선물한다. 그러나 작품은 주크박스 뮤지컬의 가장 큰 숙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2시간 45분이라는 시간 동안 쉴새없이 휘몰아치는 음악에서는 익숙한 멜로디와 다양한 곡을 '모두' 사용해야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느껴졌고, 노래가 상황에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아쉬움이 있었다.
Musical <Moulin Rouge!> photo by Matthew Murphy
작품은 원작 영화와 마찬가지로 새틴이 죽고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품에 안은채 'Come What May'를 부르며 끝난다. 그리고 다시 오프닝처럼 앙상블 배우들이 등장해 'Lady Marmalade'를 느리게 부른다. 물론 이 장면마저도 화려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쇼는 화려하다. 달콤한 초콜릿을 입안 가득 깨물어 온몸에서 단 향이 나도, 그 맛에 중독된 사람들은 쉽사리 손에 있는 초콜릿을 놓기힘들다. 붉은 장막 속에서 보여진 이 이야기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초콜릿을 연상시킨다. 손 대면 아찔한 자극이, 지금 보고 있는 매혹적인 자극이 마치 무대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물랑 루즈!>가 결국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