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화예술 공간
“예술은 사람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수단의 하나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한 세기 전 예술을 정의한 말이다. 최근 문화예술 공간이 변화하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전시관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박물관에서 체험 프로그램이 열리는 등 예술 영역들이 서로 융합하면서 소통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 담장을 허물고 재미를 더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지난달 25일 직장인 박지용(30·서울 견지동)씨는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겼다. 이들은 이날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예술가의 런치박스’ 프로그램에 참여해 예술가와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먹고 젓가락을 이용해 미술작품을 만들었다. 박씨는 “평일이지만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라 부담 없이 신청했다”며 “평소 관심 있었던 분야의 예술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고, 뻔한 데이트 장소가 아닌 색다른 공간에서 식사하고 미술작품도 만들 수 있어 신선했다”고 말했다.
# 직장인 정수진(49·여·서울 잠원동)씨는 지난달 21일 업무를 마치고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를 찾았다. 그는 아이작 줄리언 전시를 보고 난 후 아트센터 야외 공간에서 영화 ‘레오파드’를 관람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야외 공간 한쪽에 준비된 칵테일과 피자 등을 즐겼다. 정씨는 “단돈 5000원에 전시 작품을 보고 명화까지 관람할 수 있어 매우 알찼다”며 “퇴근 후에는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이는 게 전부였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예술적으로 놀다 보니 충전되는 느낌이다”라며 만족해했다.
작품 전시회, 영화 상영 병행
바닥에 누워 천장의 그림 감상
바비큐 먹으며 재즈 공연 관람
전시장에서 옛날 오락기 체험
문화예술 공간이 대중과 가까워지고 있다. 종전엔 일부 지식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누구나 보고 느끼고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예술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파리에는 휴무일을 제외하고 매일 자정까지 운영하는 미술관 팔레 드 도쿄가 있다. 오후 6시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 프랑스에서는 획기적인 운영 방침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미술관이지만 무대와 관객석을 마련해 음악 공연, 발레, 영화 등을 관람할 수 있는 파리 까르띠에 재단 현대미술관도 혁신적인 예술 공간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 문화예술 공간은 관람객들이 더욱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서울 능동 헬로뮤지엄에서 진행 중인 ‘헬로, 미켈란젤로展’ 전시는 기존의 명화를 움직이는 영상 콘텐트로 제작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바닥에 누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미술작품을 볼 수도 있다. 전시관 한쪽에는 1인용 요가 매트가 있어 각자 원하는 장소에서 편안한 자세로 천장의 그림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한 김수경(29·여·서울 시흥동)씨는 “작품 ‘천지창조’가 보이는 공간에 방석을 깔고 앉으니 작품 속 인물이 된 기분”이라며 “사람에게 떠밀려 작품을 관람할 때는 금방 지치고 피곤했는데 이곳에선 작품을 감상하면서 충분히 쉬고 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서울 한남동 디뮤지엄은 ‘YOUTH-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 전시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선보인다. 1980~90년대 유행하던 오락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카페가 마련돼 있다. 전시 주제에 맞춰 단순한 작품 관람이 아닌 활동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꾸며진다.
문화예술 공간의 체험 정보는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더욱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다. 정적인 방문 인증 사진이 아닌 사람들이 움직이고 참여한 사진들은 공간의 특징을 보여주고, 보는 이에게 ‘나도 참여해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서울문화재단 시민청 최정필 팀장은 “SNS를 통해 활동 사진을 보고 신청하는 방문자가 늘고 있다”며 “캘리그래피 작품을 전시할 땐 캘리그래피를 배울 수 있는 체험행사를 진행했는데 참여자들이 SNS에 활동 사진을 올려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식음료 즐기며 예술영화 감상
공연장과 전시장 앞에 써 있던 ‘음식물 반입 금지’ 표시가 없어진 공간도 눈에 띈다.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은 매월 예술가와 함께 관람객이 작품 앞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는 ‘예술가의 런치박스’를 진행한다.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는 야외 공간에서 칵테일과 빵, 샌드위치 등을 먹으며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블루 고 라운드’ 행사를 진행한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박민우 관장은 “더 많은 사람이 높은 수준의 예술 전시와 영화를 접할 수 있도록 편안한 환경과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기획했다”며 ”영역의 경계를 두지 않고 열정 많은 젊은 예술가를 응원하는 믹스 전시·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역삼동 라움아트센터는 바비큐 음식을 먹으며 재즈 공연을 볼 수 있는 ‘라움 가든 BBQ’를 오는 18일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목·금요일에 운영한다. 방문자는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뷔페 요리를 맛보며 프랑스 재즈 밴드인 주빈 퀸텟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원종원 교수는 “문화예술 공간의 문턱이 낮아지는 흐름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는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공간과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단순히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방문자가 문화예술 콘텐트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기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글=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사진=프리랜서 김정한·조상희
[출처: 중앙일보] [라이프 트렌드] 장르 넘나든다 예술가와 어울린다 누구나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