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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예진 Jun 28. 2018

점심 먹고 딱 10분, ‘마이크로 산책' 어때요?

현대인 걷기 신풍속도

“조용히 산책하는 게 더 좋아요. 산책만으로도 휴식 취하기에 충분해요.” 프랑스 감독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녹색광선’의 대사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취직은 했니?’ ‘프리랜서 생활은 어떻니?’ ‘남자친구는 있니?’ ‘휴가를 통해 남자를 만나보는 건 어때?’와 같은 질문에 지친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현대인도 마찬가지다. 매시간 울리는 스마트폰을 한 손에 쥐고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 생활을 하다 보면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나만의 시간, 나만의 휴식 공간이 절실하다. 이때 사무실과 집을 잠시 나와 근방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굳이 먼 거리를 떠나지 않아도 좋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10~20분, 복잡한 관계와 쌓여 있는 일에서 벗어나 가볍게 걷기를 즐기는 ‘마이크로 산책(Micro-Walks)’이 주목받고 있다.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앞길에서 마이크로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들.

# 푸른 이파리가 무성한 커다란 나무 그늘을 거닐다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낀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다 보면 샛노란 민들레 꽃이 올망졸망 피어 있다. 조금 덥다고 느껴지면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점심 먹은 후 카페에서 산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20여 분 회사 근처 공원에서 홀로 산책을 즐기다 기지개를 쭉 켜고 다시 사무실로 향한다.  


# 퇴근길, 낮에 신었던 하이힐은 가방에 넣고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보다 한 정거장 앞에서 정차 버튼을 누른다. 가로수 사이로 시원한 밤바람이 부는 거리를 거닐며 하루 종일 숙인 고개를 하늘을 향해 추어올려본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목도 가볍게 돌린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스마트폰으로 들으며 15여 분 걷다 보면 어느새 동네에 다다른다.


사무실과 집 근처를 걷는 ‘마이크로 산책’이 현대인의 새로운 휴식 방법 중 하나로 인기를 끈다. ‘아주 작은’을 뜻하는 마이크로(micro)와 산책이 합쳐진 말로, 미국 뉴욕과 브루클린 등의 도심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는 ‘100m 마이크로 산책’이라 부르며 그 공간을 구석구석 세밀하게 관찰하며 걷는 행위를 말한다. 어제 본 새싹이 키가 자랐는지, 작은 개미들이 어떻게 줄지어 가는지를 살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국내에서 즐기는 마이크로 산책의 특징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운동시간을 따로 정해서 1시간 이상씩 걷는 것과는 다르다. 직장인의 경우 1시간 점심시간을 이용해 30분간 점심을 먹고 20분은 근처 공원에서 산책하고 사무실로 향한다. 학생의 경우엔 쉬는 시간 10분을 활용해 교정을 걸을 수 있다. 이때 꼭 긴 거리를 갈 필요는 없다.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걸을 수 있는 만큼 걷다가 돌아오면 그만이다.


일산 호수 공원

깊은 숨 쉬며 가볍게
홀로 걷는 산책은 잠시 쉬어 가는 ‘나만의 휴식 시간’이다. 직장인 김준(32)씨는 “점심시간만큼은 정말 편히 쉬고 싶다”며 “동료들과 대화는 식사 때 하고 그 후에는 잠시 무리에서 벗어나 도심 공원을 아무 생각 없이 거닐거나 고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는 등 나만의 사색 시간을 갖는다”고 말했다.

깊은 호흡을 하며 홀로 걷는 시간은 스트레스와 피로 해소도 돕는다. 단시간에 살을 빼거나 근육을 키우진 못하지만 운동 효과는 있다. 특히 관절이 약하거나 허리가 아픈 사람이라면 무리해서 빠르게 걷고 달리는 것보다 10여 분 가볍게 걷는 게 건강에 좋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조현 가정의학과 교수는 “50분 일하고 10분간 산책하는 것은 피로와 스트레스로 체내에 쌓인 활성산소를 분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 교수는 “특히 짧지만 자주 걷는 것은 혈액순환에 좋다”며 “동맥과 달리 정맥은 혈관 주변 근육운동으로 크게 움직이는데, 산책을 하면 전신에 있는 근육이 사용되고 이는 곧 심근으로 혈액이 원활하게 돌아오게끔 해 혈액순환을 돕는다”고 알려줬다.  
  

무뎌진 오감 일깨워  

그렇다면 마이크로 산책을 온전히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혼자만의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읽을거리를 들고 나서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거창한 물건이 아닌 소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면 좋다. 시원한 주스 한 잔을 사거나 매일 아침 먹는 샌드위치를 챙기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하나 들 수도 있다. 음악도 마이크로 산책의 좋은 친구다. 날씨 또는 기분에 맞는 노래 3곡을 미리 정해서 15분 이내로 음악을 모두 들으며 걷는다.


모든 감각을 의식적으로 느끼는 연습도 중요하다. 야외에서 걷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모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산책 장소가 익숙하면 그저 단순히 걷는 행위로 그치기 쉽다. 의식적으로 햇볕을 느끼고 물·새·바람 소리를 듣고, 꽃내음을 맡고, 푸른 녹지를 보면서 오감을 일깨워야 한다.  

서울 성수동 서울숲공원은 홀로 거닐며 사색하기 좋은 산책로다

박성희 한국트렌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고된 운동을 하면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는 데만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사용하기 어렵다”며 “가벼운 산책은 평소 무뎌진 감각에 집중하고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줘 현대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서울 도심공원 2834곳  

장소는 아파트 산책길이나 꽃길 등 어디든 상관없다. 녹지가 있어 충분히 산소를 들이마시고 느긋하게 거닐 수 있는 곳이면 된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공원을 찾아도 좋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도심 공원은 2834곳이 조성돼 있다. 청량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금천폭포공원(금천구), 서서울호수공원(양천구 신월동), 연신내 물빛공원(은평구)이나 전시관이 있어 산책하며 문화도 즐길 수 있는 서울숲공원(성동구)·서초문화예술공원(서초구 양재동)·도곡공원(강남구 도곡동)·청와대 사랑채(종로구 효자동) 앞 광장도 있다. 생활하는 지역에서 가까운 공원을 방문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곳을 선택하면 된다. 곽상섭 한국관광공사 문화관광허브조성 팀장은 “청와대 앞길이 지난해 24시간 전면 개방되면서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산책하는 장소로 찾는 사람이 많다”며 “관광객을 비롯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야외 공연인 ‘예술로 산책로’를 마련할 정도”라고 말했다.  


글=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사진=프리랜서 김동하   

[출처: 중앙일보]  [라이프 트렌드] 점심 먹고 딱 10분 나홀로, 휴식·사색의 길 ‘마이크로 산책’

http://news.joins.com/article/2266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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