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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현 Feb 04. 2024

안내 말씀

병원 검진을 위해 나갈 채비를 하던 엄마는 역 앞 빵집에서 식빵을 사 오고 가겠다고 했다. 눈이 오는 날이었고, 나는 먼저 나간 엄마를 급히 뒤따라갔다. 몇 해 전 엄마가 욕실에서 미끄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간 적이 있어 괜히 엄마가 눈길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불안했다. 나 역시 얼마 전 빙판길에서 넘어진 탓에 빵집을 향한 종종걸음에는 긴장이 녹아있었다. 무사히 역 앞에서 만난 우리는 빵과 함께 말없이 안심을 교환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눈을 밟으며 돌아갔다.


놀이터에서 멈춰 선 나는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엄마를 뒤따라가기 전, 무심코 녹음기와 이어폰을 들고나왔다. 뭐라도 담고 싶었다. 아니, 뭐라도 만들어야 했다. 눈밭에 박힌 바퀴를 빼내야만 했다. 

나는 바닥을 향해 녹음기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폰 속으로 타고 들어왔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세하게, 눈앞에 보이는 내 발에서 나고 있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어떻게 발을 움직이는지에 따라 발에 서린 감정이 달랐다. 촬영에 들어간 배우처럼 나는 머뭇거리기도, 서서히 발을 끌기도 했다. 내린 눈이 적당히 쌓이다가 녹을 만큼의 온도였기에, 발걸음을 멈추고 녹음기를 눈 가까이에 대면 서글서글한 빗소리가 들렸다. 하얀 숲 앞에서 나는 가만히 빗소리를 담았다. 벤치 위에 올려 둔 식빵 비닐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저녁이 되면 아파트에서는 간간이 안내방송이 나온다. 실내 흡연을 하지 말라거나 소음공해에 주의해달라는 게 주된 내용이다. 기계음은 격양된 말투로 문장 사이의 호흡을 무시한 채 대본을 읽는다. 이 가짜 사람의 말 뒤에는 이곳에 사는 진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천장을 향해 녹음기를 들었다. 그리고 숨죽인 채 가짜 사람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감사하다는 마지막 인사 뒤로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은 것처럼 잡음이 이어졌다. 지글거리는 정적은 무전기를 내려놓는 듯한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대본에 오타가 있었다는 걸 나중에 녹음 파일을 확인하면서 알게 되었다. 

'시벽이나 새벽에는 작은 소리로 대화하기.' 

시를 짓기 좋아하는 버릇 혹은 시에 나타나는 작가 특유의 버릇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녹음해온 소리와 함께 음악을 만들어보겠다며 바쁜 새벽을 보내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새의 울음, 눈 위를 밟는 발,  그리고 아파트의 안내 방송이 섞인 이상한 풍경. 그 사이로 어떤 음악이 흐를 수 있을까. 이 고민을 시벽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외부에서 발생한 소리들로만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나는 작년 말에 그토록 고대하며 샀던 소프트웨어 신디사이저인 옴니스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3년 전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샀던 하드웨어 신디사이저인 OP-1의 소리만으로 음악을 만들어보려 했다. 소프트웨어보다는 상대적으로 번거로운 게 많은 만큼 실물 악기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누르는 건반에 따라 악기의 작은 화면에는 파형이 일렁였고, 내가 원하는 호흡에 따라 LFO를 움직이기 위해 재생되는 안내 방송과 실시간으로 노브를 돌렸다.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춰지듯, 옳다고 느껴지는 지점에서 나는 건반에서 손을 떼었다. 짧고 기묘한 장면이 음악으로 그려지던 순간이었다. 


눈 오는 날과 안내방송, 오타와 신디사이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일.

낮에 빵을 먹으며 새벽에 만든 음악을 퇴고하듯 다시 들었다.

거칠지만 희망적인 느낌이 음악에서 나는 이유는 엄마와 내가 별일 없이 다음날을 맞이해서였을까.

어쩌면 무엇인가 창작해 내었다는 기쁨에 의해서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에 박힌 바퀴가 빠지려면 굉음이 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Synthesizer'의 바른 표기는 '신시사이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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