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 조금이라도 쪽잠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대신 저는 오랜만에 소설책을 펼쳤습니다. 물 아래로 서서히 잠기듯 책에 몸을 뉘면 종이와 문장은 흐려졌고, 이내 머릿속에 장면이 부유했습니다.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며 숨을 고르다가, 문득 수많은 문장이 끓어올라 저는 급히 물 위로 올라왔습니다.
다시 꺼내 든 책이 당신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레 당신의 글을 일부러 더 읽지 않던 때가 있습니다. 군대에서 뛰쳐나와 이유 모를 힘에 이끌려 들어간 온라인 문학 모임에서 한 달에 한 편, 써 본 적도 없던 단편 소설을 쫓기듯 써 내려갈 때의 마음은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겁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유, 많은 것이 부조리한 이유,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 1년 가까이 소설로 질문했고 결국 정답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던 게 분명합니다.
왼발에 금이 가 수술 후 병상에 누워있을 때, 당신의 소설을 읽으며 세상에 다르게 발을 내딛는 법을 배웠습니다. 네모난 프레임을 부수고 이미지 안에 서 있는 법. 활자라는 토양 위에서 저는 누구나 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획 사이를 걷다가 휘청이고 넘어지면 지독한 몸살을 앓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저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려봤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입속에서 그 단어와 문장을 굴려보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서서히 걸음마를 떼니 달려보고 싶었고 자전거도 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에서 묵묵히 저를 붙잡아주고 있던 당신에게 손을 놓아달라고 부탁해야 할 때라 생각했습니다. 느슨해지는 손길에 동요하지 않기 위해,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강하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당신의 눈과 입이 어떤 모양을 짓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당신을 직접 처음 만난 날에는 부끄럽게도 거짓말을 하기로 다짐한 날이었습니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을 위한 강연자로 당신은 모교를 찾았습니다. 들어가 본 적도 없던 정문을 지나 죄책감과 설렘이 뒤엉켜 빠르게 뛰는 가슴을 붙잡고 저는 백양로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연세대학교가 모교가 아닌 것을 들켜 강연장 문 앞에서 되돌아가더라도 이 걸음을 해야만 후회가 남지 않을 거라는 작은 비장함도 있었습니다. 현장은 저 말고도 계단과 창틀에 동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즐비했고, 저는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라는 거짓 정보를 명단에 적어냈습니다. 확인해 주시는 분이 눈감아주신 덕에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엉킨 이 세상을 안을 수 있는가. 낮은 떨림이 있어 연약할 것만 같던 당신의 음성은 무엇으로도 그것을 부술 수 없을 만큼 단단했습니다. 말 사이의 침묵은 어색함이 아닌 심사숙고해 고른 단어가 문장이 되길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소설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드는 질문의 근원으로 직면해 간다는 것. 아무리 해도 훼손되지 않는 인간의 어떤 부분을 향해 찾아가는 것. 윤동주의 시가 당신이 사춘기 시절에 만난 문학적 첫사랑이라는 것. 그의 우물을 바라보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는 것. 당신의 소설을 읽는 동안 저는 당신의 우물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니, 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통해 손이 떨려서 책을 들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희랍어 시간』을 통해 글이 초월적인 경험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우물에서 빠져나와야만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어렴풋이 제 우물로 돌아가 봐야 했던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소중히 가지고 갔던 제 「희랍어 시간」의 빈 페이지에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빼곡히 적고 마지막으로 주문을 외듯, 오랜 기도문을 새기듯 「서시」의 구절을 썼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2017년 10월, 저의 입대를 두 달 앞둔 가을이었습니다.
길었던 머리가 제 길이를 찾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음악을 조금씩 배웠고 마음에 걸리는 사람을 보기 위해 먼 나라로 찾아가 보기도 했으며 제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준 새로운 친구도 만났습니다. 4년 만에 복학해 뒤늦은 졸업 작품까지 올렸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뛰쳐나왔던 이유. 꽁지로 묶은 긴 머리를 미용사가 가위로 자르지 못해 바리캉으로 깎아내어 제 눈 앞에 놓았을 때, 예상치 못한 폭발에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팔이 잘려 나가 제 눈앞에 굴러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당장 아프지도 않고 피도 흐르지 않아 저는 급히 훈련소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훈련병과 맨몸으로 씻고 나온 뒤, 이미 짧은 머리를 더 자르라고 명령받았을 때, 저는 손과 얼굴을 벌벌 떨면서 눈앞에 풀썩 쓰러진 긴 머리카락을 떠올렸습니다. 군 병원에서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쏟아내면서 그제야 제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끝내 지켜내야만 했던 것이 제게 있었다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증명하듯 그것을 말해야만 했던 순간의 수치심은 저를 강한 확신으로 몰아갔습니다. 군인으로서의 무능력을 인정받아 귀가를 승인받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끝내 집에 도착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갑고 빨간 딸기가 접시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그 딸기를 먹은 기억이 없습니다.
제주에서 두 달 가까이 겨울의 끝자락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세화라는 동네에서 한 달 동안은 음악가 친구들과 그리고 한 달 동안은 저 혼자서 머물렀습니다. 바다를 매일 보았습니다. 친구의 곡 가사처럼 밤바다 위로 달이 비춘 길을 따라가 보기도 했고, 고향과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엮은 선율이 어떤 의미였을지 곱씹어 보기도 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무엇도 느끼지 못했던 저는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야외 좌석이 있는 카페에서 혼자 하염없이 수평선만 바라보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에 마음속 무언가가 부서지길 기다렸습니다. 눈앞의 파도가 가전제품 코너에 진열된 TV 속 반복되는 영상이 되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렌즈처럼 어느 것도 명확히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수평선의 경계가 어두운색으로 물들며 하나가 될 무렵이었습니다. 그 고통을 겪고 나서도 끝내 진실한 나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않았다는 것. 운명이라는 사나운 핑계를 미워하기보단 그것에 기대면서, 살아내는 것에 집중하기를 포기했기에 모든 것이 흐리게 보였던 것입니다.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남지 못한 기억의 파편들. 추억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불편한 순간들. 퇴고하지 않으면 영원히 굳어버릴 형상들. 풀리지 않은 저의 과거가 현재에 머무르며 미래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울음이 멎어 고요한 저의 우물 안을 이제는 들여다보아야만 했습니다. 그 우물 속의 저 자신과 조우해 함께 무사귀환하는 것. 이는 미래를 바꾸기 위한 저의 첫 임무였습니다.
문학 모임은 서서히 흩어졌고 이후로 저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카메라로 이미지를 엮었습니다.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세계를 관찰하며 알게 된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거짓을 흉내 내도 진실을 말할 수 있었고, 흐르는 시간을 뒤섞어도 현재로 올 수 있었습니다. 네모난 프레임을 부수고 그 안에 서 있는 법, 그다음 순서로 저는 그곳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 공간에서 들리는 것과 그 공간에 서 있는 제게서 들리는 것. 어떤 외침은 음악이 되고 어떤 소리는 비명이 되었습니다. 이미지와 사운드 두 개의 다른 언어가 서로를 돕는 지점을 발견했을 때, 영상이 문장을 제시하면 사운드는 이를 설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창작에 쏟는 힘을 잃어가며 살아가야 할 이유마저 잃어가던 제게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졸업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우물 밖으로 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했습니다. 사운드를 배우기 위해 기관에 등록했고, 병원은 제 호르몬 치료를 승인했습니다.
2년 동안 저의 몸은 서서히 변했습니다. 질감과 향, 미묘한 형태의 변화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진행됐습니다. 돌이킬 수 없기에 두려움이 없었다면 이는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그리고 정말 당연하게도 내가 나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절대적인 육체를 완전히 바꿀 수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과거를 품은 육체를 현재의 선택으로 희석해 간다면 분명 미래는 달라질 테니 말입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나서던 첫날의 해방감을 저는 기억합니다. 끊임없는 질문과 부정, 그리고 다다른 인정 끝에서야 비로소 몸속에 올바른 것이 흐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뜨거운 안도감은 제가 얻은 새로운 낙관이었습니다. 음향을 배우며 소리를 이전보다 민감하게 듣게 되었고, 일의 선후관계에 따라 문제를 순차적으로 돌아보는 사고가 자리 잡았습니다. 몸과 마음의 성장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쌓으며 좋은 쪽으로 저 자신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사운드 엔지니어로서 제가 처음 작업한 친구의 새 음악이 세상에 나온 날, 국회에 총을 든 군인이 들어섰습니다. 계엄이 선포되고 헬기와 장갑차가 도심에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국회 입구를 막은 탓에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습니다. 시민들은 실시간으로 현장의 영상과 사진을 인터넷으로 공유했습니다. 영화도 아니었고, 자료화면도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은 정치활동과 집회 행위 금지, 언론과 출판의 통제, 그리고 이를 위반하면 처단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 결의를 막기 위해 계엄군은 창문을 깨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걸음에 달려온 시민들, 당직을 서던 국회 직원과 보좌관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서로의 몸을 맞대어 벽을 만들었습니다. 소화기 가루가 복도를 뿌옇게 덮었고 취재진의 플래시가 끊임없이 터졌습니다. 일상이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었고 국회 본회의장은 유일한 최후방어선이었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내일이 깊은 어둠으로 잠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귀가 조치를 앞둔 입영 장정들은 모두 한 생활관에 모여 잠에 들어야만 했습니다. 몇몇 장정들이 자신에게 명령한 여성 장교를 말하며 밤새 웃으면서 욕과 성희롱을 주고받는 동안, 저는 닫지 못하는 귀 대신 눈꺼풀에 힘을 주느라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했습니다. 아침은 밝았고 바깥에서 점호와 함께 복무 신조를 외치는 훈련병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마저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의 이름과 의식을 흐리고 단체의 일부로써 작동하게끔 만드는 과정이, 무조건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되고,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되며, 법규를 준수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명예와 신의를 지키며 전우애로 굳게 단결해야만 하는 곳. 그곳에서 같은 말을 외쳤을 이들이 국회 앞에 총을 들고 모였습니다. 겨눠야 할 무장한 적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무조건 자신들을 막는 사람을 밀치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은 국가 비상사태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몇 달은 몸이 아팠습니다. 소수자를 향한 눈길이 싸늘한 것은 어느 진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를 지지했다는 점은 그를 앞세워 제게 희망을 품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차악을 선택하는 게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버린 투표 분위기는 원하는 정책이나 의견에 힘을 보태는 것보다도 증오를 표출하는 칼과 이를 막는 방패의 싸움이 된 지 오래였습니다. 바깥에 나가면 스스로 위축됐고 지하철을 타면 이 칸의 절반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리라는 계산을 하곤 했습니다. 뉴스를 볼 수 없었습니다. 비상식적인 일들이 계속 벌어져도 해결되지 않았고, 참사는 사전에 막지도, 빠르게 수습되지도 않았습니다. 각자도생은 이기심을 합리화하고 타인의 불행에 안도감을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던 것은 그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조심히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올가을에는 퇴근하면 동네를 걸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다 보니 몸이 굳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움직여야만 살 수 있겠다 생각 들었습니다. 놓치고 있던 것이 참 많았습니다. 몇 걸음 가다 보면 금방 도착하는 어린이 놀이터의 이름은 메아리였고, 강아지인 줄 알고 뒤돌아보면 바람에 이는 나뭇잎이었습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어릴 적 동네의 모습은 재개발을 기다리는 옆 동네에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밤늦게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 보았던, 개발되지 않은 논밭 너머로 비추던 아파트와 상가의 어슴푸레한 빛이 주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을 한 골목이 머금고 있었습니다. 기억을 돌아보게끔 하는 빛이 스민 길을 떠올렸습니다. 2016년과 2017년, 촛불이 가득했던 광화문이 그러했습니다.
계엄이 해제되고 매일 탄핵 집회가 도심에서 열렸습니다. 국회의사당역에서 지하철이 정차하지 않는다는 방송이 나왔을 때,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저는 인파 사이를 뚫고 당산역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달렸습니다. 마치 그곳에 늦게 도착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숨 가쁘게 달렸습니다. 같은 곳으로 향하는 시민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긴 줄을 질서 있게 기다리며 육교를 건넜고,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이들은 따뜻한 인사를 나눴습니다. 국회와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깃발이 휘날렸습니다. 광화문에서 보았던 빛이 여의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함께 같은 뜻으로 모여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거리에서 보면서, 그날은 외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 사람들은 환호했고, <다시 만난 세계>가 거리에 울려 퍼졌습니다. 풍선이 하늘을 갈랐고, 응원봉은 별처럼 빛났습니다. 국회의장은 취소했던 송년회를 다시 잡으라 당부했고, 희망은 힘이 세다는 문장과 함께 산회를 선포했습니다. 시민들은 울고 웃으며 민주주의의 승리를 외쳤고, 귀가를 위해 마포대교를 한 시간 동안 걸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 있지 못했습니다.
시위 현장의 몇 없는 열린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제가 올바른 줄에 선 것인지 계속 판단했습니다. 여자 화장실은 저쪽이라고 외쳐주신 아주머니와 뒤에서 남자가 맞다고 안심시키는 아저씨의 친절이 저를 숨 막히게 했습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까지 모든 남성은 순간 놀랬다가 저를 흘긋 바라보기를 반복했습니다. 일행끼리 제 성별에 관해 논하는 속삭임은 항상 제게 증폭되어 들렸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은 익숙해지질 않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이 동시에 제게 의문의 눈초리를 쏘아붙였습니다. 부끄럽게도 그 시선이 두려워 이후로 시위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탄핵안이 부결되던 순간 쏟아져 나온 거대한 침묵과 탄식, 표결에 응하지 않고 본회의장 바깥으로 나간 여당 의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짖는 야당 의원들의 외침이 여의도 거리에 울려 퍼질 때의 무력감. 이 모든 것들에 짓눌려 집에 돌아간 뒤로도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죄스럽습니다. 제 또래의 많은 여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곳에서 그들과 같은 마음과 목소리로 제가 서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문득 어느 날이건 눈을 감고 다시 못 뜨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생을 적극적으로 포기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 죽음이 앞에서 저를 옥죄어 온다면 발버둥은 치겠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벼랑 끝에 다다른다면 굳이 저항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도 언젠가 제 곁을 떠난다면 제게는 책임감으로라도 살아갈 이유가 사라집니다. 마음 다해 아껴주는 친구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삶이 있기에 과한 도움을 청하고 싶진 않습니다. 어느 한쪽에 마음 편히 속하지 못하는 육체적 이민자에게는 어쩌면 삶이란 안전한 나라를 찾는 끝없는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그곳에 닿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도중에 너무 지쳐버리게 된다면, 도저히 못 하겠다는 마음이 역류해 오면 그 여정을 내려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겁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결국 이를 그만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으면 안 됐다고, 도움을 청해야 했다고 내가, 우리가 당신 곁을 지켰을 거라고 그들이 떠난 뒤에 얘기를 하지만, 그 선택까지 도달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저는 어떤 말을 하기가 두렵습니다. 살아있음이 곧 증명이자 시위라면 누군가의 삶은 내내 시위 현장이라는 말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당신의 뒤집힌 질문은 그새 우리를 구한 과거가 되었습니다. 계엄을 위해 투입된 군경 병력은 약 5,800명, 준비한 실탄의 수는 9,000발가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기갑여단장이 연루되어 있던 것을 통해 전차가 도심에 나타날 수도 있었습니다. 총이나 도끼라도 사용해 국회 문을 뜯어내라는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 선거관리위원회를 점령하기 위해 안대와 케이블 타이, 포승줄, 그리고 날카로운 도구들을 챙겼다는 것 또한 드러났습니다. 지휘부 중 한 명은 수거하라는 표현을 수첩에 적어두었습니다. 대통령은 3번의 소환을 무시했고 오늘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날 국회의원들이 국회 안으로 계엄군보다 늦게 들어갔다면 현재는 없었을 겁니다. 자기 몸으로 저지선을 만들어 계엄을 막으려던 시민과 의원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됐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미래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글조차 적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불과 이틀 전, 비행기 사고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추스를 새도 없이 이어지는 참사를 우리는 또 견뎌야 합니다.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또 고치고 준비해야 하겠지만 우선은, 유가족의 슬픔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나온 시민이었을 테고, 누군가의 사려 깊은 친구이자 가족이었을 겁니다. 어제 열린 탄핵 집회에서 사람들은 응원봉을 내려놓고 촛불을 다시 켰습니다. 검은 리본을 달고 피해자들을 향해 묵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능숙히 대처해야 하는 것인지 모두가 아는 게 마음 아픕니다. 우리는 또 과거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비통한 마음에 이 글을 쓰는 것이 맞는 것일지도 고민했습니다만, 한 시민으로서 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목소리를 끝까지 기록하려 합니다. 우리는 분명 우리 주변의 슬픔에 깊이 애도할 줄 압니다. 저는 이렇게 애도를 표하고 싶습니다.
「에우로파」는 2012년에 출간된 당신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음악가 인아와 그의 친구이자 자신의 성별에 불일치감을 느끼는 '나'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나'의 이야기가 저의 이야기 같은데도 어딘가 낯선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아는 최루액을 맞아가며 시위 현장에 가서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음악가였고, '나'는 그런 인아를 내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안에서 가 볼 수 있는 곳을 다 가 보았고, 바깥으로 향해야만 장례식을 치르듯 살아온 삶을 끝낼 수 있다고,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지만,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아는 말했습니다. 다시 그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그 모습을 외면하려 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욕망이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한 사무침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게도 실패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던 저 자신을 처음 발견해 준 사람 덕에 뱃속에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목성과 그 위성인 에우로파 같은 사랑. 그것은 한 사람 자체이기도, 또는 제가 다다를 수 없는 모습을 향한 열망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생긴 대로 살자.
군에서 나오게 된 이유와 호르몬 치료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5년 만에 어머니께 처음 알려드렸을 때, 어머니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단순하면서도 모순적인 말이 여전히 기억에 선합니다. 생긴 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생긴 모습이기에 원하는 모습을 향해 갈 수 있다면 그 길로 가라고 해주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저를 보살펴 준 사람이 제 평생의 고민을 그저 특징이라고 말해 주었다는 안도감은 굳건히 저를 지켜주는 낙관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여정을 계속 이어 나가려면 저는 새로운 낙관을 계속 쌓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놓친 것이 없는지 뒤를 돌아 보니 그곳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올곧은 예술로 사람을 치유하는 방법,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다잡아주는 영혼의 이정표가 제 안에서 남아있었습니다. 당신이 남긴 모든 것이 저를 지켜주는 낙관입니다.
처음 이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10월부터 지금까지 예상치 못하게 세상이 너무도 많이 흔들려 글이 길어졌습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처럼 여겨지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만큼 자유에 관해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대로 살 수 있는 사회일 겁니다. 소수의 절대권력이 무력으로 검열하며 통치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모든 국민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그 싸움이 끝나버리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일상이라는 그림자 뒤로 작은 목소리들은 항상 가려져 왔습니다. 집회에 나오는 이들은 차분히 자신의 의견을 요청하다 긴 인내 끝에 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어서 나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트랙터를 끌고 올라온 농민들이 경찰에 의해 남태령에 갇혔을 때 새벽 내내 지켜 준 이들의 대부분이 이삼십 대 여성이었다는 것은 비슷한 부당함과 폭력을 온몸으로 느껴왔기 때문입니다. 무지개 깃발이 모든 시위 현장에서 휘날리고 있던 것 또한 같습니다. 부산 탄핵 촉구 집회에서 발언해 주신 한 여성분의 연설처럼, 소외된 이들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져야만 약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어떠한 신체를 가졌건 상관없이 모두가 거리에 자유롭게 나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미루고 지나친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보듬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자본과 권력이 제일이고, 느리더라도 자기 뜻을 향해 가는 것이 뒤처지고 미련한 일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당신의 수상 소식은 순수성의 힘을 보여주는 방증이었습니다. 예전처럼 마음속에서 새어 나온 문장을 다듬으니 머리뼈가 삼베 발이 되어 시원한 가을바람을 흘려보내는 것 같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들여다봐야만 하는 것을 꾸준히 보겠습니다. 당신에게 진 빚과 당신으로부터 받은 빛이 많아 꼭 축하의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4.12.31
박래현 올림
추신: <작별하지 않는다>를 제주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 읽지 못하고 덮었습니다. 꽂혀있던 가름끈을 꺼내어 처음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첫 페이지에서 다시 만나면 부디 떨리는 제 손을 꼭 잡아주십시오. 희망을 내려놓지 않도록. 이 눈보라 같은 시간을 견디고 나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