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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Jan 25. 2021

언어와 사고의 관계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차이에 관하여

‘말’에 대해 떠올린 두 가지 단상 중 두 번째 단상.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고, 사고는 다시 언어를 반영한다고 합니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의 문화를 반영하고, 다시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와 사고 양식에 영향을 주기도 하죠.


어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름을 달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어(coréen)와 프랑스어(français)가 그러합니다. 여기서 한국어와 프랑스어는 한국과 프랑스의 각기 다른 문화와 관습, 생활, 사고 양식을 담고 있으며,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의미를 갖는 어떤 표현을 비교해볼 때,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재현된 표현의 차이는 서로 다른 문화, 관습,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을까요? 단순히 표현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만으론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제가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그립다(=보고 싶다)’, ‘햇볕을 쬐다’. ‘혐오표현’이란 표현들을 사례로, 제가 그간 고민해온 한국어와 프랑스어의 언어상의 차이에 대한 사유를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한국어로 ‘나는 네가 그립다(=보고 싶다)’라는 문장은 프랑스어에서 ‘Tu me manques’라고 표현됩니다. 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면 ‘너는 내게 결핍되어 있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한국어의 표현은 그립고 보고 싶다는 ‘나’의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두는 반면, 프랑스어의 표현은 그러한 상태의 원인·이유가 되는 ‘너’의 부재에 보다 주목합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함은 그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죠. 누군가에게 그립다는 마음을 전할 때, 그리워하는 나의 상태를 되뇌는 말도 물론 아름답지만, ‘내게 결핍된 너’를 말하며 보고 싶다 말하는 프랑스어의 표현은 애틋한 마음을 보다 풍성하게 전해주는 듯합니다.


‘햇볕을 쬐다’라는 말은 프랑스어에서 ‘profiter du soleil’라고 표현됩니다. 이를 직역하면 ‘햇볕으로부터 이익을 얻다’란 뜻이 되죠. 한국어에서 ‘햇볕을 쬐다’라는 표현이 햇볕이 나에게 내리쬐는 상태에 초점을 두는 반면, 프랑스어의 표현은 햇볕을 쬠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이익, 이득에 보다 초점을 둡니다. 즉, 햇볕을 쬐는 일은 단지 가만히 햇볕을 받는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우리가 어떤 이익과 이득,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같은 태양 아래 서 있을 때, 이로부터 이익과 즐거움을 얻을지, 혹은 아무것도 얻지 않을지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각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 이익이 따스함이든, 밝음이든, 개운함이든, 각자가 누리길 원하는 그 무엇이든 간에 말이죠.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혐오표현’이라 말하는 표현은 프랑스어에서 ‘un discours toxique’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한국어로 옮기면 ‘독을 품은 말’ 정도 될 것입니다. 한국어와 프랑스어 모두 표현의 속성을 품고 있는 것은 같으나, 프랑스어의 표현에는 말이 수신자에게 닿을 때의 효과와 영향이 더 선명하게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향하는 말이 독성을 품고 있다면, 그 말을 받는 사람의 몸엔 독이 퍼지겠죠. 만약 그 독이 온몸으로 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때론 삶을 좌우할 만큼 치명적이진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간 우린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독을 품고 뱉어왔을까요.. 서로 호의와 친절과 사랑을 전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서로 독은 전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가지 예시는 한국어를 모국어로 둔 화자로서, 제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준 프랑스어 표현들입니다. 위의 세 가지 표현의 사례에 한정해서 보면, 프랑스어의 표현이 보다 구체적이고 풍부하며, 언어와 그 대상이 되는 사람 간의 관계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화자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화자보다 그리움과 애틋함을 더 풍성하게 느끼고 전하며, 햇볕을 쬐면서 이익과 즐거움을 얻고, 혐오의 말에 담긴 독성을 자각하며 더 주의를 기울일까요? 반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화자는 그리움의 감정을 보다 덜 풍성하게 느끼고 전하며, 자연에서 얻는 이익에 둔감하고, 혐오의 독성과 위험성에는 덜 민감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선뜻 답을 내리긴 어려운 문제입니다. 실제로 언어와 공동체, 언어와 사고가 맺는 관계가 언어 표현상의 차이와 어떤 연관성을 가질지 궁금해지네요.


어쩌면 동일한 의미를 담은 어떤 한국어의 표현을 접한 프랑스인도 이와 비슷한 호기심과 인식의 지평의 확장을 경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규명하기가 어렵더라도, 적어도 다른 언어에 대한 앎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누군가는 그리움을 말할 때 결핍과 부재를 생각하고, 햇볕을 쬘 때 그로부터 이익과 즐거움을 취하며, 혐오의 말을 마주할 때, 그 말이 품은 독성을 생각하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다른 언어를 안다는 것은, 일상에 새로운 결을 입히는 일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간 보아온 세계와 결이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거죠.


언어를 매개로 한 지평의 확장이 타자를 향하게 된다면, 타인에 대한 포용력도 확장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무엇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한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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