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에 맞춰 사는 것

by 희량

“순리에 맞춰 사는 것, 넌 길들여져 버렸니. 괜찮니.” 2011년을 풍미했던 소녀시대의 노래 ‘The boys’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땐 뜻도 모르고 흥얼거린 가사가 어느 순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당신이 무언가에 길들여졌냐고 묻는 말은 꽤나 묵직하지 않은가. 주체성에 대한 상실, 심지어 그 상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무지를 은연중에 내포한다. 이 가사는 순리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고, 그 환상에 완전히 용해된 ‘너’의 모습을 지적한다. 괜찮냐고 묻는 질문은 적응과 안주에 대한 짙은 걱정을 담았다. 이미 ‘안 괜찮음’을 알고 물어본 것이다.


순리란 ‘무리가 없는 순조로운 이치와 도리’를 뜻한다. 그러나 무리가 없고 순조로움을 결정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에 무리가 없고, 얼마나 순조로워야 하는가.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한가. 물론 얻을 수 없는 가치라 순리를 더 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리 없고 순조로운 삶은 시도하지 않는 삶이지 않나. ‘모든 건 순리대로’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겸손인가, 무언갈 시도하고 행동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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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순리를 정의하는 요소는 무수하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배운 순리란, 태어나서 ‘보통의 가정’에서 자라나고 ‘보통의 교육’을 받고 ‘보통의 일’을 하고 ‘보통의 이성’을 만나 ‘보통의 결혼’을 하고 ‘보통의 아이’를 낳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순조로운 삶의 안정성을 깊이 애정할 것이다. 보통의 삶이야말로 가장 풍요롭다 말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평범함의 축복을 모르지 않다. 심지어 누리고 만끽해왔다. 그러나 내가 질문하고 싶은 건, 그 순리가 무엇을 의미하고, 진정으로 원하는지 고민해볼 기회가 있었냐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요즘 주장하고, 지향하고, 동경하는 것들은 모두 순리에 반하는 것이다. 번식이라는 생존본능을 거부하고, 여성의 신체에 내재된 생물학적 역할을 부정하고, 육식으로 이어지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죄책감을 갖고, 부모와 자식으로만 구성된 핵가족 시스템의 강압을 들춰내고, 이성애와 시스젠더를 둘러싼 맹목적 도리를 비웃는다. 순리를 거부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안을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독신여성, 아이가 없는 부부, 채식주의자, 편부모가정이나 조손가정, 혹은 홀로 자라온 사람들, 동성 커플이나 트랜스젠더, 혹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양한 소수자들. 이래도 자연이 설계한 대로, 자연스럽게, 순리에 맞춰 사는 게 옳다고 여길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자연이 설계한 방식을 순리라 여기는 게 아니라, 자연의 순리라고 인간이 해석한 내용을 칭송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법칙은 굉장히 다채로운데, 수와 비율의 문제로 옳고 그름을 나눈 것이다. 다양성이라는 자연의 안배를 존중하지 않고, 다수의 방식을 옳다고 여긴 것이다. ‘다수’에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 것은 인간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리’라는 단어는 인간을 초월한 객관성, 거부할 수 없는 절대성을 띠고 있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모든 건 순리대로’라는 말은 종종 다수의 방식이 유일한 도덕적 규범임을 단언하는 강요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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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에 응시하는 학생이 많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로운 세대에서는 ‘순리'대로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점점 생겨난 것일까? 야간‘자습’시간조차 주어진 대로 응하던 나의 학창시절과 비교하면, 적어도 교육 방식에 대해서는 순리의 환상이 조금 걷혀진 듯하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스스로 공부하는 것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각자 누리고 있는 것과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단맛과 쓴맛을 맛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자라나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다양한 행보를 보이며, 사회를 다채롭게 채워갈지 기대된다는 것이다.


순리가 한쪽으로만 그어지는 평탄한 선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꼬불꼬불하고, 삐죽삐죽하고, 엉킨 선을 그려낼 수 있다. 순리는 선에 그치겠지만, 뒤엉킨 선들은 다양한 도형을 만들어낼 것이다. 벗어나는 것, 비껴가는 것, 놓치는 것에 대한 환상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리를 거부하는 마음이나 행위가 아니다. ‘순리’가 만들어낸 환상이 얼마나 굵직한 구분선을 긋고 있는지, 그걸 알아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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