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지속의 상관관계

by 희량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절치부심’이라는 사자성어를 알려주셨다.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임”이라는 뜻으로, 분노를 양분 삼고 오기를 불태워 공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고등학교 생활의 초입, 수능이 뭔지도 몰랐던 그때 듣기엔 참 무정하다. 그 말씀이 딱히 인상 깊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뇌리에 콕 박혔다. 다른 사자성어는 흐릿하게 잊어가도 절치부심만큼은 종종 생각이 났다.


학창시절, 나는 수학에 가장 약했다.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 자꾸만 막히고 틀려서, 욕설을 읊조리며 문제집을 구기고 내던지기 일쑤였다. 울면서 포효한 날도 많았다. 한번은 빨간 색연필로 모든 문항에 빗금을 좍좍 그으며 틀림 표시를 해대기도 했다. 넌 단 한 문제도 맞힐 자격이 없다는 듯이. 그냥 죄다 틀리고 말라는 듯이. 그래서 수학 문제집만 유난히 닳고 헤졌다. 이제 여러분은 내 성격이 드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면모이지만, 부정할 수 없음을 안다.


나의 미흡을 직면하고 느낀 좌절은 보통 분노로 표현된다. 지금도 여전히 내 무능함에 온몸이 절여질 때가 있다. 한국 논문으로 충분한 자료를 찾지 못해 호기롭게 영어 원서를 찾았는데, 거의 모든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 화가 솟구쳤다. 익숙한 단어의 뜻도 잘 떠오르지 않아 자기 한심과 경멸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만 학창시절과 다른 점은 자본주의가 세게 주입되어 차마 책을 던지지 못하는 소심함이 생겼다는 점이다. 어쨌든 내 마음 속에는 언제든 활활 타오를 수 있는 분노의 도화선이 수없이 많은 게 분명하다. 이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절치부심이라면 난 이걸 재료로 활용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극에 달한 분노는 자포자기한 심정에 점점 가까워진다. 다 포기하고 말자는, 사서 고생하지 말자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잘하려 들지 말고, 적당히 살자고. 무욕은 평안이고, 욕심은 고난이라고. 그러나 이때의 포기는 겸허한 수용이 아닌 극도의 자기혐오다. 말 그대로 끈적이는 진창과도 같은 기분이 날 감싼다. 무얼 해도 안 될 것 같은 극도의 비관적인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 쌀쌀맞은 시선은 나의 시도를 코웃음 치고, 뭘 해도 무용지물일 거라며 비웃는다. 이쯤 되니 알겠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나의 실수와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너그럽게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무능을 용서하지 못해서 그렇게도 노여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노는 재료가 될 순 없었다. 수용이 우선이었다. 멀리 돌이켜보아도 좌절감과 분노는 양분이 된 적이 없었다. 분노를 잠재우고 날 앞으로 이끌었던 방법은 그저 눈앞의 할 일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화나도 어쩌겠나, 하고 마는 삼삼한 마음. 벌개진 얼굴을 식히며 수학문제를 마저 풀다보면 짜증과 분노는 조금씩 가라앉고 어느새 풀이에 집중한 내 모습을 발견한다. 영어 논문도 마찬가지였다. 솟구치는 화를 끌어안고 다음 문장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그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이상 흉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일까, 분노는 몇 번 쏟아내면 나머지는 삼킬 수밖에 없다. 조금 씩씩댈 뿐이지 남은 불씨는 점점 작아진다. 그렇게 분출과 소화를 겪으며 나는 식어간다. 그때부터 눈앞에 놓인 종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게 내가 매번 선택해온 해결방법이었다. 분노와 오기로 절치부심하며 현재를 극복하고 미래로 도약하라니?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그런 적도 없다. 들끓는 승부욕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것이 날 나아가게 했다.


삶의 연속성이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좌절과 분노는 지나간다. 우리의 감정은 순간을 단면으로 인식하지만, 결국 나를 구성하는 것은 순간의 집합이다. 그래서 뜨겁게 불태우면 안 된다. 미지근하게 계속해야 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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