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급함

by 희량

지난 글을 읽은 친구가 나의 분노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기는 학창시절에 문제를 못 풀었다는 이유로 화내본 적이 없단다. 그럼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친구는 내가 조급해보인다고 했다.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해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왜 며칠 붙잡고 천천히 고민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을 향한 재미있고 흥미로운 여정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오, 들켰다. 난 정말 인내심이 없는데. 조급함뿐일까. 나는 욕심도 많았다. 이 둘은 제일 환장하는 조합인데, 충분한 노력 없이 곧바로 잘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에 수학 문제 못 푼다고, 영어 문장을 이해 못 한다고 성깔을 부리지. 배우고 익히는 치열한 학습의 과정을 최대한 짤막히 보내길 바라고, 금방금방 능숙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완전한 도둑놈 심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작은 티끌을 모아 태산을 만드는 법을 몰랐다. 그 차분하고 지루한 과정을 견디고, 또는 즐기는 법을 몰랐다. ‘사나고’라는 유튜버가 참 신기했는데, 나는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번 해내기 때문이었다. 그는 3D 프린팅 펜으로 아주 작은 가닥들을 촘촘하고 섬세하게 쌓아 어엿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내가 이렇게 손짓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가며 오랫동안 공을 들여본 적이 있었던가.


나와 달리 내 동생 떵이는 느림의 결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신중하다. 차분하게 말을 고르고, 깊게 생각한다. 반면, 나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해 다음의 할 말을 성급하게 꺼낸다. 공백 없이 빽빽한 핑퐁으로 대화가 이루어져야 만족스러워 한다. 떵이는 이런 내 모습을 싫어하기도 하고, 힘겨워 하기도 한다. 그는 내 성급함의 원인을 서울의 삶에 돌리곤 하는데, 유일한 원인은 아니더라도 주요한 영향을 준 건 틀림 없다.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삶에 제대로 안착한 나머지, 언제나 성큼성큼 걸을 수 있는 줄로만 아는 거지.


그런데 나도 어느 순간 내 걸음이 촘촘하지 않고 듬성하다는 걸 느꼈다. 효율과 빠름을 추구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세심히 챙기지 못하는 것들이 생긴다. 분주한 걸음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인상적인 풍경을 놓치기 마련이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화내는 사람은 보통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다. 느리게 걷는 사람은 깨끗한 표정으로 툭툭 일어나 다시 걸음을 이어가겠지. 나의 순간적인 미흡함에 전전긍긍해하는 조급함이야말로 최대의 미흡이었다. 차근히 쌓아갈 줄 아는 사람은 작은 실패들과 작은 성공들을 섞어 커다란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무언가에 오랫동안 파고드는 깊이, 무언가 곱씹었을 때만 만날 수 있는 단물. 이걸 모르는 내 삶은 얼마나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걸까.


그래서 브런치에 ‘느린 산문’이라는 제목으로 느린 삶에 대한 글을 조금씩 올려보기도 했다. 느리지 않은 삶을 살아가서 그런지, 느린 삶이 로망이 되어가는 즈음이기도 했다. 느림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의 성마른 삶을 회고했다. 빠른 필기 속도에 어그러지는 글씨, 엉키는 발걸음, 빠르게 쓰는 깊이 없는 글에 대해 적고, 잠시 맛본 느긋함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털어놓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상에서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느린 산문을 쓰고도 여전히 성급한 삶을 살고 있다. ‘사나고’의 느릿한 작업 과정을 감상할 수 있는 이유는 빠른 속도로 편집했기 때문인 것처럼.


마음 한 켠 한 켠을 파고들면 복잡하고 이중적인 생각들을 발견한다. 느림에 대해 논하는 것만으로도 빠른 삶의 엉킴을 풀어낼 수 있다고 안심하고, 느린 삶의 묘미를 알고 있으니 나는 적어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라며 위안 삼는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 당장에는 속도를 향유해도 괜찮을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심지어 다른 한 쪽 마음에는 도시에 적응한 사람들이 가진 고질적 문제를 나 또한 끌어안고 있다며, 뒤쳐지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일종의 특권처럼 여기는 세속적인 면모도 있다. 웃길 노릇이다.


난 여전히 속도를 경외하고, 낙오를 두려워한다. 속도를 늦추는 법은 도저히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가는 마음을 붙잡을 단단한 명목이 없다. 당장의 할 일에 파묻혀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여유를 추구할 수 있는 그럴싸한 핑계가 되어줄까. 과연 나태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낭비 같고, 평일에 일하지 않는 것은 사회로부터 도태되는 것 같다면? 해결과 다짐으로 아름답게 글을 끝맺고 싶지만, 난 아직 해결방안도 다짐할 만한 무언가도 찾지 못했다. 속도에 대해서만큼은 그저 씁쓸함을 고백한 채로 마무리해야 진실됨이라도 갖출 수 있다. 난 아직 순간의 멈춤도, 더딘 걸음도 누릴 수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분노와 지속의 상관관계